정주 외국인에 대한 “민주적 지배”
지배의 정당성과 외국인 ㅤ우리는 민주주의를 논할 때 정당성 문제를 비켜갈 수 없다. 켈젠H. Kelsen은 국민주권의 실현을 통해서 민주주의가 정치적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보았다. 드워킨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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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1조와 외국인 참정권
관련 글: 2023.04.07 정주 외국인에 대한 “민주적 지배” 정주 외국인에 대한 “민주적 지배”지배의 정당성과 외국인 ㅤ우리는 민주주의를 논할 때 정당성 문제를 비켜갈 수 없다. 켈젠H. Kelsen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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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ㅤㅤ나는 지난 글에서 외국인에게 지방선거권을 부여한 공직선거법 조항이 헌법상 국민주권주의에 위배되며 민주주의 원리에 따른 국민의 자아실현과 자기결정을 저해하므로 위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나의 주장과는 달리 학계와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대상조항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고 오히려 외국인의 참정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는 의견이 존재한다. 이와 같은 유형의 주장으로는, 특히 외국인이 법률상 ‘주민’으로서 지방선거권을 가질 수 있다는(혹은 가져야 한다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으며, 그밖에는 외국인에게 지방선거권을 부여할 것인지는 선거권의 내용을 결정할 권한이 있는 국회의 입법형성에 달려있다는 견해, 외국인의 지방 참정은 국민주권에 의한 통제를 받으므로 문제시되지 않는다는 견해, 국민주권의 원리상 ‘국민’ 개념이 외국인에게 확장될 수 있다는 견해, 상호주의에 따라 외국인의 지방선거권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견해 등이 거론되고 있다.
Ⅱ.
1.
ㅤㅤ주지하는 바와 같이 외국인의 지방선거권을 긍정하는 견해로는 외국인이 헌법상 “국민”으로서는 지방선거권을 가질 수는 없지만, 법률상 “주민”으로서는 이를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이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다.1 이는 외국인의 지방선거권이 “주민”이라는 법률적 지위에 근거하여 부여된 것이고 법률상 인정된 권리이므로,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이나 국민주권주의와 상충하지 않는다는 논지다. 그러나 이 견해는 우리 헌법의 해석상 타당하다고 볼 수 없다.
2.
ㅤㅤ종래 헌재는 참정권에 대한 외국인의 기본권 주체성을 부인해 왔으며, 선거권자의 “국적”은 선거권 및 선거제도의 본질상 요청되는 내재적 제한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2 이처럼 외국인에 대한 선거권의 권리 주체성이 부인되는 이유는 헌법 제1조의 국민주권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국민주권주의는 국가의 의사와 질서를 최종적ㆍ전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인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원리다. 이에 따르면 국가권력의 근원과 주체는 국민이며 오직 국민만이 국가의 정치적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3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선거권은 가장 긴요하고 실질적인 주권행사의 수단이고, 이러한 주권행사의 수단이 주권자인 국민에게만 인정될 수 있음은 국민주권주의에 따른 당연한 법리적 귀결이다.
ㅤㅤ국민이 아닌 사람에게 주권행사의 수단을 인정하는 것은 주권자를 국민으로 규정한 헌법에 반하는 것으로 허용될 수 없다. 헌법 제1조 제2항은 문언상 명백하게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선언하여 모든 국가권력이 갖추어야 할 정당성의 기반이 국민일 것을 보장하고 요구하고 있다. 이때 “국민”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점은 헌법제정ㆍ개정 주체로 “대한국민”을 명시한 헌법 전문과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요건”을 언급한 헌법 제2조 제1항, 헌법상 기본권 주체인 “국민”에 대한 일반적인 법 해석에 비추어 명백하다. 그런데 만일 외국인에게 선거권이 인정된다면 국민은 더는 국가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단일한 인적 기반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선거권은 헌법상 국민주권주의가 모든 국가권력에 안정되고 통일된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가 될 수 있도록 국민에게 제한되어야 한다.
3.
ㅤㅤ단체장과 지방의원이 지방자치단체의 법적 구성원인 주민에 의하여 선거되어야 한다는 것은 지방자치제도의 목적과 취지, 지역공동체에 기반한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관점에서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주 외국인이 지역주민이기 때문에 국민인 주민과 마찬가지로 지방선거권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지방자치가 국민자치를 지역적 범위 내에서 실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4
ㅤㅤ헌법 제117조 제1항은 지방자치단체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근거이지만, 이 조항으로 인하여 지방자치단체가 국가로부터 분리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헌법이 지방자치단체의 자치권을 규율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가 내부의 제도로서 지방자치단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즉, 지방자치단체는 실정법 이전의 어떤 독자적인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라 국가의 헌법과 법률에 근거하여 설치된 조직으로 국가의 구조 속에 편입되어있다. 헌법 제1조 제2항이 규정한 국민주권주의는 헌법의 근본결단으로서 정치적 지배에 관한 기본 원리이므로 국가의 내부 조직인 지방자치단체 역시 당연히 그 규율을 받는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지방선거권의 주체로서 “국민”과 “주민”의 엄격한 분별은 가능하지 않다. 국민주권주의에 따라 지방정부를 포함한 모든 국가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주체는 국민이므로 지방선거권을 가진 사람은 주민이기 이전에 국민이어야 한다.
ㅤㅤ헌재는 “지방자치제도의 헌법적 보장은 국민주권의 기본 원리에서 출발하여 주권의 지역적 주체인 주민에 의한 자기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거듭 판시하고 있다.5 그런데 주권의 속성으로 이해되는 단일ㆍ불가분성을 고려하면 한 국가 내에서 주권이 분할되거나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행사될 수는 없으므로 “주권의 지역적 주체인 주민”이란 결국 국가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국민의 한 측면으로 이해되며, 주권행사의 기초가 되는 기본권의 보유자로서 개별 국민이 지방자치단체의 물적 구성요소인 지역과 결합하여 집합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봄이 상당하다. 만약 외국인의 지방선거권을 긍정하려 국민과 주민을 준별한다면 주권의 귀속ㆍ행사 주체가 국민과 주민으로 양분되어 주권의 단일ㆍ불가분성과 모순되고, 국민주권주의는 국민이 국가권력에 안정되고 통일된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로 기능할 수 없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주권은 국민주권 하나뿐이며, 그와 독립된 주민주권이란 존재할 수 없다. 요컨대, 국민과 주민의 엄격한 분별을 전제로 주민인 외국인의 지방선거권 주체성을 인정하는 법 해석은 현행 헌법상 가능하지도, 타당하지도 않다. 따라서 지방자치제도를 고려하여 지방선거권의 주체를 “주민”으로 해석하고자 하더라도, 그 “주민”은 국민주권주의에 따라 “국민인 주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외국인인 주민”은 여기에 포함될 여지가 없다.6
4.
ㅤㅤ외국인의 지방선거권 주체성을 긍정하는 견해는 스스로 민주적인 이론이라고 자부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국민주권과 민주주의를 모두 기만한다. 다수의 연구에서 확인되듯이 긍정설은 지방 차원의 선거에서 (간혹 피선거권을 포함하여) 외국인의 참정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대통령ㆍ국회의원 선거 등 전국 차원의 선거에서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인정하는 데에는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는 정주 외국인에게 민주주의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고 보면서도 해당 원리가 정치적 평등을 전제하는 것과는 달리 외국인과 국민의 정치적 지위에 차등을 두는 것이므로 모순적이다. 이처럼 불완전하고 제한적인 참정권의 인정은 결국 외국인과 내국인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ㅤㅤ외국인의 참정권 보장을 지지하는 연구 대다수는 지역사회와 거주민이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토대로 지역공동체의 정치적 결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당해 지역의 “주민”인 외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반면, 이는 현실에서 국가가 지방자치단체보다 외국인에게 더 크고 포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간과한 것처럼 보인다. 지방자치단체는 그 자치권이 법령에 의하여 형성ㆍ제한되며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사무를 처리하고, 개인은 지역적 범위로 제한된 자치법규보다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적용범위를 가지고 직접 권리ㆍ의무를 규율하는 법률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개인의 삶과 밀접한 정치적 결정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외국인도 응당 지방선거뿐만 아니라 전국 차원의 선거에서도 참정권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뒤따라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술하였듯이 학자들 다수는 그런 주장에 소극적이며, 그 이유로 국민주권주의에 따른 제약이 존재한다고 서술한다.
ㅤㅤ학설과 판례에서 국민주권주의는 그 개념적 혼동7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전국선거에서는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주의가 동시에 적용되는 반면, 지방선거에서는 양자가 분리되어 국민주권주의만 예외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해명이 요구된다. 이에 관하여 지방선거권의 주체가 “국민”이 아닌 “주민”이라는 설명은 전술한 것처럼 지방선거권의 주체인 주민이 “국민인 주민”이라는 해석으로 반박될 수 있다. 이에 대한 재반론은 민주주의의 고유한 특성, 곧 민주주의는 정치적 권리의 주체와 정치권력의 지배를 받는 자가 서로 일치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 호소할 개연성이 커 보인다. 그러나 이는 다시금 외국인이 국가의 지배하에 있는데도 지방선거권만 가질 수 있을 뿐 국정선거권(대통령ㆍ국회의원 선거권 등)은 갖지 못한다는 역설에 직면함으로써 논증의 순환에 갇히게 된다.
ㅤㅤ결국 외국인이 당해 지역공동체의 정치적 결정에 민감한 “주민”이기 때문에 지방선거권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스스로 전제하는 민주주의 원리의 일관성 있는 적용을 보여주지 못하고 자의적이며, 외국인 참정권의 존재가 국민주권주의와 모순된다는 지적을 회피하고자 “주민” 개념을 무리하게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외국인의 지방선거권 주체성을 긍정하는 관점은 정합성 있는 해석이 아닌 것이다.
Ⅲ.
1.
ㅤㅤ헌법 제24조에 따르면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질 수 있으므로, 선거권과 관련된 구체적 내용의 형성은 법률에 유보되어있다. 이 조항에 비추어 외국인의 지방선거권은 국회의 입법형성권 범위에 포함되며, 법률로써 외국인의 지방선거권을 규정한 것은 주권자인 국민의 대리 의지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8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과 별개로 헌법 제118조 제2항이 지방선거를 비롯하여 지방자치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사항을 법률로 정하도록 위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므로, 지방선거의 원칙과 절차뿐만 아니라 지방선거권의 주체를 정하는 것 또한 입법자의 입법형성권에 포함되는지가 문제시될 수 있다.
2.
ㅤㅤ입법이 주권자의 대리 의지의 발현이라는 관점에서 외국인의 지방선거권을 규정한 법률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살피자면, 국회가 주권자인 국민의 대의기관으로서 상당한 수준의 민주적 정당성을 갖는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국회의 권한은 행정부, 사법부의 권한과 마찬가지로 헌법에 부합하도록 행사되어야 하며 헌법이 정한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요컨대 국회가 위헌적인 내용의 어떤 법률을 제정했을 때 그 법률은 주권자의 대리 의지의 발현이라는 식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따라서 위 견해는 외국인의 지방선거권을 인정한 법률이 합헌이라고 전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선결문제의 오류다. 왜냐하면, 그러한 법률이 위헌인가 합헌인가는 바로 외국인 참정권 논의의 주요 쟁점이기 때문이다.
ㅤㅤ더군다나 헌법 제24조가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고 규정한 것은 선거권이 포괄적인 입법권의 유보 아래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권을 법률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하라는 뜻이다.9 그러므로 입법자가 선거권의 내용을 법률로 규정하는 경우에도 국민주권주의를 선언한 헌법 제1조 등 제반 규정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이를 정해야 한다.10 이때 고려되는 국민주권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헌법의 본질적 원리가 근거를 둔 연혁적ㆍ이념적 기초로서 헌법에 담긴 최고 이념을 구성하고, 이러한 이념은 입법형성권 행사의 한계와 정책결정의 방향을 제시한다.11 국민주권주의는 통치원리에 관한 헌법의 근본결단이므로 국회는 이에 반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으며, 그러한 법률은 위헌이다.
ㅤㅤ지방선거권은 대통령 선거권, 국회의원 선거권과 마찬가지로 헌법 제24조에 의하여 보호되는 선거권이고,12 이러한 선거권은 국민주권의 원리를 실현하기 위한 헌법상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권리다.13 실제로 국민의 지방선거권이 수행하는 국가권력의 정당화 기능은 이들 선거권과 다르지 않다. 이른바 대통령 선거권, 국회의원 선거권 등 “국정선거권”과 “지방선거권”을 준별하는 견해는 전국 차원에서의 선거 주체가 국민인 것에 반하여 지방 차원에서의 선거 주체는 주민이라는 관점에 의존한다. 하지만 지방선거권의 주체로서 “주민”이 “국민인 주민”이라는 점은 전술한 바와 같다. 헌법은 입법자가 선거권의 내용을 구체화할 때 헌법 제1조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이를 정할 것을 요구하며, 이에 따라 형성된 선거권의 구체적 내용과 보장은 외국인에게 선거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ㅤㅤ따라서 외국인의 지방선거권 도입에 관하여 입법자가 폭넓은 입법형성권을 가진다고 볼 수는 없다. 외국인의 참정권을 인정할 것인지는 최소한 헌법적 차원의 문제이지, 법률적 문제는 아니다. 국민주권주의는 헌법의 연혁적ㆍ이념적 기초로서 근본결단에 해당하므로 법률에 의하여 유보되거나 예외를 설정할 수 없다. 헌법의 기본적 동질성 내지는 헌법개정권력의 한계에 관한 이론적 논의는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가사 국민주권주의의 내용을 변경하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이는 헌법개정으로만 할 수 있다.14
Ⅳ.
1.
ㅤㅤ헌법 제2조 제1항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요건은 법률로 정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국민이 누구인가 하는 국민의 내용에 관한 실체적 결정이 입법자의 몫이라는 점을 근거로 헌법상 “국민”은 개방적인 개념이며 정주 외국인을 잠재적 국민으로 볼 수 있는 이상 입법형성권의 범위 내에서 이들의 참정권을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취지의 견해로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외국인 지방선거권 위헌확인 사건에서 제시된 당사자 의견이 있다.15 한편 역사적으로 국민주권이 군주주권에 대항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등장했다는 사실로부터 그 본래 취지는 “국적을 가진 자가 주권자이다”라는 것이 아니고 국민 위에 선 권위를 배제한다는 의미로 새겨야 하므로 국민이란 당해 사회에서 정치적 의사결정에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16 이에 따르면 국민주권의 원리상 “국민”은 당해 국가에 생활 근거를 가진 정주 외국인을 포함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한다.
2.
ㅤㅤ헌법이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요건을 입법사항으로 유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헌법상 “국민” 개념에 관한 실체적 내용이 오로지 입법자의 결정에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적은 성문의 법령을 통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생성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므로 헌법의 위임에 따라 「국적법」이 제정되지만, 그 내용은 국가의 구성요소인 국민의 범위를 구체화ㆍ현실화하는 헌법사항을 규율하고 있는 것이다.17 또한, 입법자가 제정한 법률은 입법 과정에서 준수되어야 하는 제반 원칙이 적용되며, 상위규범인 헌법에 저촉되는 내용을 포함해서는 안 된다. 헌법이 입법권에 부과하는 한계는 입법자가 스스로 헌법상 “국민” 개념을 정할 수 있기 때문에 참정권을 국적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는 해석을 차단한다. 오히려 헌법은 명시적으로 주권자가 “국민”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개인이 주권자인 국민에 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적을 가질 필요가 있고, 국적은 실질적 주권행사의 수단인 참정권에 전제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다.
ㅤㅤ국민주권 이론의 등장 취지를 고려할 때 국민주권상의 “국민”이 정주 외국인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오늘날의 법 현실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국민주권주의가 태동하게 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더라도, 과거와 현재의 이론적 논의의 결이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늘날 독일, 한국 등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주권을 논할 때 “국민”을 당해 국가의 국적 보유자와 연결하는 관점은 국민주권에 대한 무지나 오해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국적법」 혹은 시민권법을 포함해서 국가 구성원의 자격에 관하여 정교하고 체계화ㆍ구체화된 법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국민주권에 관한 이론적 기반도 이러한 실정법상의 토대 위에서 함께 발전하고 성숙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국민은 국적을 가진 사람이다”라는 법 명제는 단순명료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실제로 그 바탕에는 헌법을 비롯한 전체 법질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국민의 개념적 정의에 관계된 법철학ㆍ정치철학적 맥락과 그에 대한 답변을 함축하고 있다.
3.
ㅤㅤ헌법상 “국민”의 의미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자”라는 점은 법문언과 법체계에 비추어 명백하다. 헌법 전문은 “대한국민”을, 헌법 제2조 제1항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요건”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물론 헌법상 “국민”이 정주 외국인을 배제한 “대한민국 국민”만을 의미한다고 보는 이유는 단지 헌법이 우연히 “대한민국 국민(또는 대한국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헌법이 적용ㆍ존속되는 공간으로 전제하고 있는 정치공동체가 무엇인가 하는 사유로부터 우리는 “국민”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국민 없이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 연결되는 의문은 “누가 국민인가”이며, 국가가 성립된 초기에는 역사적ㆍ문화적ㆍ사회적 맥락이 고려되어 국민이 결정되었겠지만, 점차 국가의 법질서가 성숙하고 발전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국민은 기성 국가 구성원의 합의된 기준을 충족하였을 때 구성원으로 수용하는 법적 개념으로 확립된다.
ㅤㅤ구체적으로 국가 구성원이 되는 요건을 정한 법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무엇이 국민인가”, “누가 국민이 되어야 하는가”, “국민은 어떤 지위를 갖는가” 등의 논의가 수반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국민의 정의에 관한 공동체의 합의된 규준은 「국적법」이며, 국가의 형상을 개별 국민이 결속된 정치적 공동체로 파악할 때 「국적법」은 국제법이 적용되는 다원적 국제사회 내에서 우리 정치공동체를 다른 공동체와 구분짓는 실정법적 기준이 된다. 또한, 국민국가(nation-state)의 출현 이래로 역사적 전통 속에서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을 당해 국가에 생활 근거를 두고 있는 사람이나 국가의 정치적 지배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 인정할 실증적인 근거는 희박하며, 오히려 주권을 보유한 국민은 해당 국가의 구성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오늘날 외국인의 참정권을 인정하는 국가조차도 외국인을 국민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내용을 생략한 채, 초창기 국민주권은 이런 의미였으니 국민주권의 원리상 국민은 외국인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에 부합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맥락을 무시하는 태도로 보인다.
4.
ㅤㅤ헌법 제1조 제2항에 따라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국적은 개인이 주권자인 국민에 속하기 위한 요소이고, 참정권은 국민이 실질적으로 주권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렇다면 국적은 참정권에 전제된다. 외국인에게도 일종의 준(準)시민권으로서 주민권(denizenship)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견해가 있으나,18 이를 인정하더라도 주민권의 내용에 참정권을 포함할 수는 없다. 이는 국민주권주의를 규정한 헌법 아래에서 많은 난점을 유발한다. 국민의 고유한 정치적 권리를 외국인에게 확장하는 입법은 헌법 제2조 제1항 및 「국적법」에 따른 국적의 제도적 보장을 형해화한다.
ㅤㅤ개인과 국가는 서로 국적을 매개로 연결된다. 국적이 없다면 이들 사이에는 법적ㆍ정치적 관련성을 찾기 어렵다. 국적은 국가와 그 구성원 간의 법적 유대이고 보호와 복종의 관계를 뜻하므로 이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19 다만 국적은 개인과 국가 사이의 유대를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러한 유대가 감정적인 영역을 넘어서 법적ㆍ정치적 영역에서 정당화되려면, 곧 구성원이 정치공동체와 함께 운명과 책임을 공유하고 그렇게 보는 것이 공정하다고 평가되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 조건 가운데 하나는 공동체가 개인을 진정한 구성원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과 그 실천으로서 기본권 보장을 의미한다. 또 한편으로 개인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갖고 자신을 구성원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민주주의 국가에서 진지하게 자신을 스스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민주주의는 진실된 공동의 자기 지배를 의미할 수 없다.
ㅤㅤ국적이 명목적이고 형식적인 자격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법적ㆍ정치적 유대를 의미하려면 국적에는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권리와 의무, 자유와 책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국가와 외국인 사이에는 공동체와 구성원 간의 유대와 같은 관계를 발견할 수 없다. 외국인은 이미 자신이 속한 외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다른 국가와 정치적 유대를 맺을 동기를 약화한다. 또한, 유대는 단순히 권리의 측면에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공동체는 구성원의 협력과 헌신 없이는 존속이 불가능하다. 권리만 주어지고 의무가 없다면 그런 관계는 상호적이지 않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유대라고 할 수 없다. 외국인은 우리 공동체를 위한 의무를 부담하고 있지 않으며, 설령 그런 의무를 강제하고자 하더라도 자신의 외국 국적을 행사하여 이를 거부하거나 회피할 수 있다.20
ㅤㅤ영주의 체류자격을 취득한 외국인 대다수가 외국 국적의 동포,21 국민의 배우자 등 특수관계인이라는 점은 위와 같은 나의 주장에 반대하는 논거로 제시될 수 있다. 즉, 이들은 그 특수성에 비추어 국민과 유사한 지위에 있다거나 유대가 인정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 영주 외국인 중 특수관계인의 비율이 높은 것은 순전히 정책 시행의 결과로서 나타난 우연적 사실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입법자의 의사와 무관하다. 대상조항은 그 법문언에서도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듯이 지방선거권을 특수관계인이 아니라 외국인에게 부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특수관계인이라는 사정은 사실적 요소이며 국적과 같은 규범적 효력이 없다. 따라서 특수관계인의 지위와 국민의 지위는 동일한 것으로 평가될 수 없다. 법적으로 특수관계인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 외국인 신분이다. 국가의 존망이 내국인과 외국인에게 각각 미치는 영향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Ⅴ.
1.
ㅤㅤ학계에서는 지방자치단체의 자치권이 법령에 의하여 형성ㆍ제한되므로 국민주권의 통제 아래에 놓인다는 점을 근거로 지방자치 수준에서 외국인의 참정권을 인정하는 입법이 국민주권주의와 대립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22 이 견해는 지방자치단체의 사무와 자치법규는 헌법 및 법률의 규율을 받으며, 특히 국회가 제정한 법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음을 지적한다. 헌법 제117조 제1항에 따라 지방자치단체는 “법령의 범위 안에서” 자치에 관한 규정을 제정할 수 있고, 헌법 제118조 제2항은 지방자치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사항을 “법률로” 정하도록 요구한다. 대상조항이 국민주권주의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관점은 주권자인 국민이 그 대의기관인 국회를 통해서 지방자치단체를 규율하기 때문에 외국인의 지방선거권이 인정되더라도 국가권력의 정당화 문제는 발생하지 않거나 사소한 수준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2.
ㅤㅤ그러나 지방자치단체의 활동이 민주적 통제 아래에 있더라도 그것이 국민주권에 의한 정당성 부여가 불필요하다거나 보충적인 수준으로도 충분하다는 이유는 될 수 없다. 지방공무원도 다른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헌법상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23 따라서 원칙적으로 국민으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특히 헌법은 권한과 책무가 막중한 몇몇 공직에 대하여 고도의 정치적 중립성ㆍ독립성이 요구되거나 임명직으로 두는 편이 더 적절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국민에게 직접 정당성을 부여받게끔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헌법 제118조 제2항에 따르면 지방의회의원과 단체장은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어야 한다.24 이는 자치권이 국회가 제정한 법률에 근거하여 형성ㆍ제한된다는 사실만으로는 정당화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ㅤㅤ지방자치단체의 자치권은 국가 통치조직의 분배와 작용에 관한 것으로 국가권력의 일부분을 담당하는 권한이다.25 그 권한 행사의 중추적 기관인 지방의회와 단체장은 엄연히 자치권의 범위 내 국가권력의 담당자이므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규정한 헌법 제1조 제2항 후단에 부합해야 한다. 헌법이 이들 공직자에 대한 정당성 부여 절차를 선거로 규정하고 있고, 국민주권주의에 따라 국민이 국가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안정되고 통일된 인적 기반이 되려면 선거권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에게 제한되어야 한다. 외국인의 선거권이 인정되는 선거제도 아래에서 국민의 의사는 선거에 정확한 결과로 반영될 수 없고 필연적으로 일정한 왜곡을 수반하게 된다. 국민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는지 불분명한 선거로 발생하게 될 정당성의 손상은 선거 자체의 결함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에 그 결함 있는 선거로 선출된 권력이 국회의 감독을 받거나 법률에 근거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치유될 수 없다.
Ⅵ.
1.
ㅤㅤ오늘날 외국인의 지방선거권 관련 논의에서 국민주권주의 다음으로 많이 언급되는 법원리는 상호주의일 것이다. 상호주의란 국가 간에 등가인 것을 교환하거나 동일한 행동을 취하는 주의로, 외국인의 법적 지위와 관련해서는 내국인이 외국에서 누리고 있는 범위 안에서 외국인에게도 같은 정도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헌법은 제6조 제2항에서 “외국인은 국제법과 조약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그 지위가 보장된다”라고 규정하여 상호주의를 취하는 듯 보인다.26
ㅤㅤ그런데 외국인의 지방선거권 인정 여부에 있어 상호주의는 찬성과 반대 입장 모두 이를 논거로 활용할 수 있기에 양날의 검과 같다. 학계에서는 외국에 대하여 재외한국인의 법적 지위와 관련한 주장을 할 때 합리성과 설득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지방선거의 참정권 확대를 포함한 외국인의 법적 처우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27 오히려 외국에서 한국인의 현지 참정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실을 근거로 들어 상호주의에 맞게끔 대상조항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찾아볼 수 있다.28
2.
ㅤㅤ외국인의 지방선거권 도입이 논의되었던 초기에 상호주의는 대상조항을 뒷받침하였지만, 지금은 이를 비판하는 근거로 원용되고 있다. 상호주의의 견지에서 외국인의 지방선거권에 가해지는 비판은, 상호주의를 명분 삼아 외국인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극단주의 사례를 제외하면, 비교적 합리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렇지만 입장을 공유할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호주의 논거에 부정적이다.
a.
ㅤㅤ우선 상호주의를 근거로 권리를 도출하는 것은 권리에 대한 적절한 접근법인지 의문스럽다. 국제법상 상호주의는 호혜성의 원리를 의미하고, 이는 당사국이 자국 내의 상대국 국민(외국인)에 대하여 상대국에서 자국민이 받는 것과 동등한 대우를 하겠다는 내용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가령 한국에서 재한일본인의 지방선거권을 인정하면 일본에서도 재일한국인의 지방선거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주의에 입각할 때 권리는 개인의 존엄성에 관한 표현이나 그 존엄성을 실현하는 기반으로서가 아닌, 단지 국가의 외교적 정책 목적에 봉사하는 수단으로서 존재한다. 상호주의를 권리의 토대로 보는 것은 그 위에 세워진 권리의 지위를 불안정하게 만들며, 입헌-민주국가의 정치철학적 기반인 인간의 존엄성 존중 및 기본적 인권 보호 원리와 호환된다고 보기 어렵다. 과거 상호주의가 외국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근거로 언급되었던 것과는 달리, 오늘날에는 외국인의 권리를 제한해야 하는 근거로 원용되고 있는 사실은 상호주의의 토대 위에 서 있는 개인의 권리가 얼마나 위태로울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ㅤㅤ헌법상 외국인의 권리 보호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을 선언한 헌법 전문과 “외국인은 국제법과 조약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그 지위가 보장된다”라고 규정한 헌법 제6조 제1항,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규정한 헌법 제10조 제2문에서 그 법적 근거를 구해야 하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토대로 해명되어야 한다. 다만, 내가 다른 글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한 바와 같이 참정권을 기본적 인권의 범주에 포함하더라도 외국인이 자국에서 정치적 박해를 받는 것을 인권 침해로 평가할 수 있을지언정 외국인이 타국의 국정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여 타국 정부가 그 외국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자국 내에서 외국인의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 원리나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b.
ㅤㅤ외국인의 지방선거권 도입 후 20여 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상호주의가 입법론으로서 타당하지 않다는 점은 경험적으로도 입증되었다고 생각된다. 「공직선거법」의 입법연혁을 살펴보면, 대상조항은 입법론상 상호주의를 기대하고 제정되었지만,29 실제로 상호주의에 따라 재외한국인의 선거권을 인정하고 있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국내에서 외국인 지방선거 참정권의 법제화가 논의된 배경에는 재일한국인의 현지 참정권 인정 문제가 깊이 연관되어있는데, 정작 일본에서는 아직도 재일한국인의 지방선거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참정권 인정 조건으로 일본 국적의 취득을 요구하고 있다.
ㅤㅤ대상조항은 조약이 아니라 단지 국내법에 불과하므로 국가 간의 법적 의무를 발생시키지 않으며 일방적이다. 자국 내 외국인의 현지 참정권 보장에 관한 상호주의가 국제법상 강제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다른 글에서 지적하였듯이 상호주의에 따른 재외한국인의 현지 참정권 보장 여부는 전적으로 재외한국인이 거주하는 해당 외국의 정부가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 달려있으며, 각 국가의 특수한 사정상, 가령 일당독재나 전제군주 국가처럼 민주주의 국가의 참정권과 유사한 형태의 권리를 발견할 수 없는 경우나, 독일처럼 해당 국가의 헌법 해석상 외국인에게는 참정권이 제한되는 경우에는 현실적으로 상호주의를 기대할 가망이 없다.
c.
ㅤㅤ결정적으로, 내가 상호주의에 부정적인 이유는 대상조항의 위헌성 때문이다. 일부 학자는 상호주의에 따라 대상조항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입법정책상의 문제일 뿐 위헌성 논증과 무관하다. 상호주의에 입각하여 “재외한국인의 지방선거 참정권을 인정하는 외국의 국적자에 한정하여 지방선거권을 부여”하도록 대상조항을 개정하더라도 그 위헌성은 해소되지 않는다. 대상조항이 국민주권주의에 위반된다는 점을 상호주의로 정당화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헌재는 외국인의 평등권 주체성에 관하여 상호주의에 따른 제한이 부과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참정권과 같이 그 성질상 외국인에게 인정될 수 없는 권리에 대한 평등권 주장은 허용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30 그렇다면 참정권은 상호주의와 무관하게 외국인에게 인정될 수 없다.
Ⅶ.
ㅤㅤ지금까지 외국인에게 지방선거권을 부여함이 헌법상 허용되는가에 관하여 이를 긍정하는 학술적 견해를 차례대로 검토하였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외국인의 지방선거권을 인정하는 것은 국민주권주의와 모순되며 우리 법체계와 조화되기 어려운 해석이다. 세계적으로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 외국인의 참정권을 인정하는 입법례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국가별 문화와 역사, 전통에 따라 상이하며, 어떤 일관된 원리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자국민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것은 확실히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공통되게 인정하는 확립된 원리이지만, 참정권 보장의 범위를 외국인에게 확대하는 것은 일관되지 않으며 논쟁의 영역에 속한다.
ㅤㅤ일부 학자와 사회운동가는 민주주의 원리가 정주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할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참정권의 확대가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졌더라도 민주주의는 공동체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역사의 또 다른 측면을 보면, 전후 식민제도는 본국 국민으로부터 식민지 주민으로의 참정권 확대가 아닌 식민지의 독립으로 종식되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듯이, 민주주의의 실현 주체인 사람들, 곧 인민(people)은 진정한 자기 지배를 위해서 그 전제조건으로 그들 자신의 공동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공동체가 무엇이고 그 구성원이 누구인가는 민주주의에 선행되는 문제이며, 따라서 민주주의 자체에서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없다. 민주주의로부터 공동체와 구성원의 자격을 도출하려는 시도는 선결문제의 오류를 범하는 것으로, 잘못된 비논리적 순환을 낳을 뿐이다.
ㅤㅤ오늘날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공동체의 일반적인 단위는 “국가”이며, 구성원은 “국민”이다. 물론 유럽연합의 실례가 보여주듯이 민주주의는 그보다 넓은 영역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지만, 이는 각 주권국가 간의 자유로운 합의에 기초한 “유럽공동체”의 설립과 “유럽시민권”을 확립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최소한 우리 헌법상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을 전제로 한 “대한민국 국민”의 자기 지배를 의미한다. 민주주의 원리가 외국인으로의 참정권 확대를 요구한다는 견해는 민주주의가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민주적 공동체의 구성원이란 그 정치적 지배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들이 특정 국가의 구성원인 이유는, 설령 그 국가가 민주주의를 통치형태로 채택하고 있더라도, 해당 국가의 지배를 받기 때문만은 아니다. 외국인의 정치적 권리에 우호적인 입장조차도 “모든 외국인”이 아닌 “정주 외국인”의 참정권에 초점을 두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위와 같은 접근은 지배를 확장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열망과 결합하여 민주주의를 명분 삼아 다른 공동체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거로 사용될 수 있어 부적절하다. 가령 위 관점에 따를 때 강대국이 약소국을 강제로 병합한 후 점령지 주민에게 참정권을 보장한다면 주민들은 곧바로 점령국의 구성원이 되며 그 지배는 주민들에 대하여 민주주의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주민들에 대한 지배가 진지하게 민주주의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스럽다.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은 민주주의에서 관찰되는 주된 특징이지만, 그것이 민주주의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ㅤㅤ관점에 따라서는 나의 주장이 외국인을 우리 공동체 내의 민주주의 실현 주체에서 배제한다는 점에서 비이성적인 감정적 동화론31에 근거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민족주의와 민족자결의 이념이 정서적으로 강력한 것이기는 하나, 나는 “한민족의 혈통”과 같은 어떤 신화적인 민족 개념이 구성원의 자격을 결정짓는 기준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외국인이 대한민국의 국적을 취득함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이 될 길은 열려있으며, 입법자는 대한민국에 합법적으로 정착하여 개인적ㆍ사회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외국인의 국적 취득을 용이하게 하도록 적절히 「국적법」 규정을 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각에서는 정주 외국인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개인의 국적 유무가 정말로 중요한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32 하지만 이는 국적 취득이 공동체와 개인 간의 사실적ㆍ주관적 유대를 법적ㆍ객관적 유대로 전환하는 절차로서 의의를 지니며, 국적이 국가와 개인 간에 유대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격요건이라는 점을 간과한 주장이다.
ㅤㅤ우리 헌법상 국민, 주권 그리고 민주주의의 관계를 고려할 때 체계상의 정합성을 갖춘 해석 아래에서 외국인의 참정권이 인정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국민과 주민을 준별할 수 있다거나, 국회가 이 사안에 대하여 입법재량을 가진다거나, 국민이 개방적인 개념이라거나, 외국인의 지방 참정이 주권에 의한 통제를 받는다는 식의 주장은 국민주권주의를 직면하지 않고 우회하는 전략으로 문제의 본질에서 비켜나 있는 것이다. 외국인 참정권 인정 여부는 현행 헌법의 테두리 내에 있는 주제가 아니라 그 바깥에 있는 것이며, 외국인의 참정권 주체성을 인정하고자 한다면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Dec 17, 2025
- 김광재, “다문화사회와 민주주의의 실현 방안 - 외국인의 정치적 권리의 확대를 중심으로 -”, 법조 제68권 제4호(2019. 8.), 63. [본문으로]
- 헌재 1999. 1. 28. 97헌마253등, 판례집 11-1, 54, 60 참조. [본문으로]
- 헌재 2025. 4. 4. 2024헌나8, 판례집 37-1, 268, 329. [본문으로]
- [헌재 1991. 3. 11. 91헌마21, 판례집 3, 91, 100; 1996. 6. 26. 96헌마200, 판례집 8-1, 550, 557; 1999. 11. 25. 99헌바28, 판례집 11-2, 543, 550; 2004. 12. 16. 2004헌마376, 판례집 16-2하, 598, 604. [본문으로]
- 헌재 1998. 4. 30. 96헌바62, 판례집 10-1, 380, 385; 1999. 11. 25. 99헌바28, 판례집 11-2, 543, 551; 2006. 2. 23. 2004헌바50, 판례집 18-1상, 170, 182; 2014. 6. 26. 2013헌바122, 판례집 26-1하, 561, 556; 2019. 8. 29. 2018헌마129, 판례집 31-2상, 218, 224. [본문으로]
- 다만 이러한 해석은 국민주권주의와 관계된 “지방선거권의 주체로서 주민”에 관한 것이므로 지방자치단체가 외국인 주민의 복리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거나 외국인이 거주민으로서 복지를 누리는 데에는 지장을 주지 않는다. 외국인 주민은 그 성질상 외국인에게 인정되지 않거나 상호주의에 따른 제한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속한 지방자치단체의 주민으로서 일정한 법적 권리를 향유할 수 있다. [본문으로]
- 김해원, “국민주권주의(헌법 제1조 제2항)와 헌법재판소의 결정: 비판적 분석을 중심으로”, 선거연구 제1권 제15호(2021), 67-90. [본문으로]
- 이용승ㆍ심승우, “이주민의 참정권 논쟁과 다문화 민주주의의 모색”, 시민사회와 NGO 제21권 제1호(2023), 270-271. [본문으로]
- 헌재 2014. 1. 28. 2013헌마105, 판례집 26-1상, 189, 197 참조. [본문으로]
- 헌재 2007. 6. 28. 2004헌마644등, 판례집 19-1, 859, 874; 2011. 12. 29. 2009헌마476, 판례집 23-2하, 806, 827; 2020. 5. 27. 2017헌마867, 판례집 32-1하, 364, 372. [본문으로]
- 헌재 1989. 9. 8. 88헌가6, 판례집 1, 199, 205 참조. [본문으로]
- 헌재 2016. 10. 27. 2014헌마797, 판례집 28-2상, 763, 771 참조 [본문으로]
- 헌재 2007. 6. 28. 2005헌마772, 판례집 19-1, 899, 906 참조. [본문으로]
- 독일에서는 일부 외국인의 지방선거권을 인정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선거법에 대하여 1990년 연방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이 내려진 후, 1992년 연방의회가 기본법을 개정하여 유럽연합 회원국 국적자에 한정하여 지방선거 참정권을 인정하고 있다. [본문으로]
- BVerfGE 80, 37, 44f. [본문으로]
- 이윤환, “국내 장기거주 외국인의 참정권에 관한 연구”, 법과정책연구 제5권 제1호(2005), 185. [본문으로]
- 헌재 2000. 8. 31. 97헌가12, 판례집 12-2, 167, 176 참조. [본문으로]
- 박진완, “외국인의 선거권 인정문제로서 주민권과 국민주권 사이의 갈등의 조절: 독일에서의 논의를 중심으로”, 한국이민정책학보 제8권 제2호(2025. 8.), 167-188. [본문으로]
- 헌재 2000. 8. 31. 97헌가12, 판례집 12-2, 167, 176. [본문으로]
- 외국인의 참정권을 긍정하는 주장은 보통 외국인에게 납세의 의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만, 대한민국의 영역 내 외국인의 납세ㆍ준법 등의 의무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의무”가 아닌 “타국의 주권을 존중해야 할 의무”의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봄이 타당하다. [본문으로]
-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 제2조 제2호. [본문으로]
- 이윤환, “정주외국인의 피선거권 도입 가능성에 관한 연구”, 디지털정책연구 제11권 제3호(2013. 3.), 16. [본문으로]
- 헌법 제7조 제1항, 헌재 2025. 4. 10. 2021헌바123등, 결정문, 13 참조. [본문으로]
- 헌법 제118조 제2항은 지방자치단체의 선출 방식에 관하여 이를 “선임방법”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헌재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에 대한 주민직선제 이외의 다른 선출방법을 허용할 수 없다는 관행과 이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광범위하게 존재”함을 근거로 지방자치단체의 장 선거권이 헌법 제24조의 선거권에 해당한다고 판시하였으므로(2016. 10 27. 2014헌마797) 선거 외의 방법은 인정될 수 없다. [본문으로]
- 헌재 2024. 3. 28. 2021헌바57, 공보 330, 524, 528 참조. [본문으로]
- 권영성, 2010, 헌법학원론(개정판), (파주: 법문사), 316. [본문으로]
- 노석태ㆍ김남철, “한국에서의 외국인의 인권”, 법학연구 제48권 제1호(2007. 8.), 255-288. [본문으로]
- 양해원ㆍ유근환, “지방선거에서 중국인 등 외국인 영주권자 선거권 배제 필요성에 관한 연구”, 한국지방자치연구 제26권 제2호(2024), 1-11. [본문으로]
- 김수정ㆍ박태균, “한국의 외국인 지방선거 참정권 도입의 역사와 현황”, 국제ㆍ지역연구, 제32권 제2호 (2023. 여름호), 180 이하 참조. [본문으로]
- 헌재 2014. 4. 24. 2011헌마474등, 판례집 26-1하, 117, 124. [본문으로]
- 오동석, “한국에서 외국인 참정권 문제의 헌법적 검토”, 공익과 인권 제1권 제1호(2005. 2.), 51. [본문으로]
- 田中宏, “재일 외국인 참정권”, 민족연구 제42호(2010), 3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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