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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단상

정주 외국인에 대한 “민주적 지배”

by Hershel Layton 2023. 4. 7.

지배의 정당성과 외국인

ㅤ우리는 민주주의를 논할 때 정당성 문제를 비켜갈 수 없다. 켈젠H. Kelsen은 국민주권의 실현을 통해서 민주주의가 정치적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보았다. 드워킨R. Dworkin이 보기에도 민주주의는 정당성 문제로부터 유리된 채 이해할 수 없다. 이들 외에도 학자들은 ― 비록 세부적인 인식 차이는 존재했을지 몰라도 ― 민주주의를 정당성과 연결 지었다. 여기에 굉장히 간단한 사례가 있다. 만일 우리가 당장 내일부터 18세 이상의 여성을 징집하여 일정 기간 병역에 복무하도록 법률을 개정하려고 한다. 이때 여성에게만 투표권을 주지 않는다면 이후 새로운 병역법을 적용하여 여성을 징병할 정당성이 훼손될 것이다. 정당성에 기여하는 정치적 권리에는 투표권이나 선거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도 분명 정당성에 기여한다. 표현의 자유는 단지 수단으로서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이루는 근간이다.[각주:1]

ㅤ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존재하며, 심지어 인정되지 않는 것이 정당하다고까지 여겨지는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다른 나라에 정주하여 그 나라의 주권에 따른 지배를 받을 때다. 이즈음에서 약간 심술궂은 의문이 생긴다: 참정권이 없는 외국인에 대한 지배에는 정치적 정당성이 있는가? 한 국가의 경계선 안에서는 그곳의 국민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해당 국가의 법을 준수해야 한다. 로마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에 한국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상하지만, 로마인이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경우 그가 외교관으로서 면책특권을 향유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한국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상식적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외국인은 자신이 체류하는 국가에서 참정권을 갖지 못한다. 즉, 외국인은 그들의 대표를 가질 권리가 없는데도 한국 정부의 지배에 복종해야 한다.

ㅤ정치적 정당성 논변에 비추어 볼 때 자국 정부의 지배에 순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외국인의 처지에서 충분히 가혹하게 느껴질 수 있다. 말하자면, 한 정치공동체에서 시행 중인 민주적 지배를 포착할 때 관측자가 외부인(외국인)이라면 해당 정치공동체 구성원의 독재로, 관측자가 내부인(국민)이라면 자치로 보인다. 그러나 이 논변은 민주주의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외국인에게 참정권이 없음을 문제시하지 않는다. 외국인은 우리 정치공동체의 법적 구성원이 아니므로 자치의 일부가 아니고, 따라서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 실은, 멀리 갈 필요 없이 로마에서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국가의 주권이 일정한 공간적 범위, 곧 영토, 영공, 영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지극히 당연하다.

외국인 참정권 인정의 헌법적 문제

ㅤ그러나 외국인에게 ― 제한적으로라도 ― 참정권을 부여하는 입법례는 의외로 드물지 않다. 한국도 지방선거에서 일정한 조건을 만족한 외국인에게 선거권을 부여하고 있다.[각주:2] 그런데 도대체 왜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주는가? 이것은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사실상 그들을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통합을 도모하려는 것인가? 혹은 그들에 대한 지배의 정당성을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한 타협책인가?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이 헌법상 정당화될 수 있는지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 앞선 의문보다 선행하는 문제다. 만일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면 우리는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기로 결론지어야 한다.

ㅤ학설과 판례는 외국인의 지방선거 선거권이 법률상 권리라고 한다.[각주:3] 다시 말해서 외국인의 선거권은 법률로써 창설된 것이고, 법률의 존속 여부에 따라 변경되거나 폐지될 수 있다. 그렇다면 국민이 갖는 지방선거 선거권은 어떠한가?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한 기본권이다.[각주:4] 따라서 지방선거에 대한 외국인과 국민의 선거권은 내용적으로는 같지만, 성질적으로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는 국민주권과 선거권의 관계를 고려할 때 헌법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ㅤ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한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 조항이 국민주권주의를 규정한 것이라고 본다. 국민주권과 선거권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헌법재판소에 따르면 선거권은 국민주권의 원리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헌법적 요청이며,[각주:5] 헌법 제1조의 국민주권주의에 따라 대한민국국민이 아닌 자는 원칙적으로 선거권의 권리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한다.[각주:6] 이러한 법리에 따를 때 외국인의 선거권을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은 국민주권주의의 예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ㅤ그렇다면 헌법은 해석상 그러한 예외를 허용하는가? 외국인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면 국민에 대한 정치적 지배의 일부는 우리 정치공동체 구성원이 아닌 자들에 의한 것이 된다. 그리고 국민인 유권자의 투표가치는 외국인 유권자 수에 비례하여 감소한다. 이때 전자는 정치공동체 구성원의 자치, 곧 한국 국민이 그들의 책임 아래에 스스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원칙이 손상됨을 뜻하고, 후자는 특정한 법률적 권리의 창설로 인해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됨을 의미한다. 이것이 지시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 같은 예외를 허용하면 헌법의 주요 원칙들이 훼손된다.

외국인 참정권 옹호론

ㅤ일부 학자들은 국내로 많은 외국인이 유입되고 그들의 수가 나날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외국인에게 지방정치에 한정하여 참정권을 인정하는 것을 고려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헌법은 지방자치단체가 제정할 수 있는 자치에 관한 규정을 “법령의 범위 안”으로 제한하고 있으며, 지방자치단체가 주민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부과하는 사항 또는 벌칙을 조례로 정할 때는 반드시 법률의 위임이 있어야 한다. 이처럼 지방정치는 헌법과 법률에 의해 주권적 통제를 받고 있으므로 문제시될 게 없다는 것이 찬성론의 근거로 종종 언급된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외국인의 참정권을 인정하는 것은 헌법적 문제를 야기한다. 다만 우리는 주장의 안쪽에 놓인 심층적인 이유에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할 수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궁금한 것은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해야 하는지다.

ㅤ내가 생각하기에 설득력 있는, 그리고 자주 언급되는 논거는 다음 3가지 정도로 보인다. 첫째, 외국인 참정권 보장은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사회적 통합에 기여한다. 둘째, 정주 외국인은 국내에서 납세의 의무를 지고 세금을 납부하는 만큼 세금이 어떻게 사용될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 민주주의가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이며 진정으로 인민에 의한 지배rule by the people라면 주권자여야 하는 것은 정치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ㅤ첫 번째 논거는 이상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있으나 현실성이 떨어진다. 작년을 기준으로 국내 장기체류 외국인은 156만 9천여 명(취업자격 외국인은 40만 6천여 명)이지만, 영주자격이 있는 외국인은 16만 8천여 명이다.[각주:7] 과연 수많은 국내 체류 외국인을 제쳐두고 영주권자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있을까? 설령 법률이 정한 조건을 지금보다 완화해서 더 많은 외국인에게 더 폭넓은 참정권 ― 선거권뿐만 아니라 피선거권과 정당에 가입할 권리까지 ― 을 부여한다손 치더라도 사회적 통합에 기여할지 의문이다. 정치는 통합의 장이지만, 동시에 적대적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외국인 참정권 보장은 지금 우리가 처한 정치적 양극화와는 다른 새로운 ― 어쩌면 본질적으로 같거나 유사한 ― 형태의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 더구나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통합을 저해하는 주된 요인이 문화적ㆍ정서적인 측면에서 비롯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외국인에게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사회통합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견해는 순진한 구석이 있다.

ㅤ두 번째 논거는 주로 외국인의 선거권 보장을 긍정하는 데에 활용된다. 사실 참정권과 납세를 연결 짓는 정치 구호는 역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비록 보스턴 항구에서 차(茶)를 바닷속에 던진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이 “대표 없이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라고 외치기는 했으나, 참정권이 납세의 반대급부라고 생각했기에 그랬던 것은 아니었으며, 20세기 초 영국에서 여성들이 정부에 저항하기 위해 “투표할 수 없으면 세금도 없다(No vote, No tax)”는 기치 아래에 결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세금을 낸다는 사실이 참정권을 가져야 할 이유라면 일정 기간만 체류하면서 돈을 벌 목적으로 취업비자를 받아 입국한 외국인에게도 그 논리가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영주자격이 있는 외국인과 그렇지 않은 외국인 사이의 차별을 정당화해야 한다. 아마 정주 외국인의 참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정당화 사유로 그들은 단순히 방문객이 아니며 이곳을 진지하게 삶의 터전으로 삼고 주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점을 제시할 것이다. 그런데 이 생각은 정주 외국인과 그들을 지배하는 정치공동체 사이에 모종의 연결고리가 있음을 암시한다. 환언하면, 그 생각은 정주 외국인과 공동체를 서로 연결하게끔 만드는 특수한 조건들을 전제한다. 이 조건들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관계가 있다. 나는 잠시 후 이 문제를 다시 다룰 것이다.

ㅤ마지막 논거는 앞서 살펴본 두 가지보다 더 흥미롭고 솔깃하며 민주주의의 중심을 꿰뚫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흔히 민주주의란 인민에 의한 지배라고 한다. 그런데 인민은 누구를 지배하는가? 왕이나 귀족을 지배하는가? 인민은 그들 스스로 지배한다. 어떤 측면에서 민주주의는 통치 권력을 창출하는 정치적 권리의 주체와 그러한 권력의 지배를 받는 객체가 서로 일치함을, 곧 지배하는 자(治者)와 지배를 받는 자(被治者)가 동일함을, 주권의 행사주체와 귀속주체가 같음을 의미한다. 자기 지배를 이상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인민 다수에게 선택받은 소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인민 그 자체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의 발전은 그러한 의미에 합당한 지배를 확립하는 과정이었다. 민주주의의 양식으로 포착된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은 종종 참정권 확대의 근거로 원용되었다.[각주:8] 하지만 고대 아테네뿐만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외국인의 참정권은 보장되지 않거나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공동체의 진정한 구성원

ㅤ누군가는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근대 국민국가modern nation-state에 기댄 낡은 사고에 불과하다고 비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옳고 그름을 떠나서, 외국인이 ― 원래 그들이 속한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국경 안에서도 ― 정치에 참여할 자유와 권리를 보유한다고 인정하는 것의 의미는 그들을 우리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외국인에 대한 참정권 보장을 옹호하는 이들은 국내에 정주하는 외국인을 우리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수용할 준비가 되었거나 이미 구성원이라고 전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들은 참정권이 국민의 고유한 권리로서, 그것의 성질상 외국인에게는 부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차는 공동체 구성원의 자격에 관한 이견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은 누가 정치공동체의 진정한 구성원인가 하는 점이다.

ㅤ제헌국회는 헌법을 제정하면서 민주주의를 통치의 기본 원리로 채택했으며, 이러한 통치질서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민에 의한 지배를 뜻하는 민주주의가 통치 원리로서 헌법을 통해 구현될 때 그것이 전제한 “인민”을 사안에 알맞게 개념적으로 정의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헌법해석상 그것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이다. 이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헌법은 제1조 제2항에서 국민이 주권자이며 국가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원천임을 천명하고, 그 바로 아래 제2조 제1항에서 국민이 되는 요건을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해 보인다. 만일 국회가 모든 외국인에게 자동으로 한국 국적을 부여하거나 누구든 법무부에 신청만 하면 곧바로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는 내용의 법률을 만들었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이 법률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으며 위헌이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인민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할 때 드워킨의 다음 견해는 영감을 준다.

 

“… 누가 인민인가? 어느 날 일본이 노르웨이 시민들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부여하고, 그들이 원한다면 소수 무리의 노르웨이인들을 선출하여 일본 의회에 보낼 수 있게 된다고 하자. 그리고 일본 의회는 다수결을 통해 노르웨이의 석유에 세금을 부과하고 이것이 일본 정유사로 이전되도록 명령한다. 이런 공상에 의할 때 노르웨이인들에게 자기 통치가 주어진다고 볼 수 없다. 만약 모종의 다수결주의적 과정에 의해 진정한 자기 통치가 주어지려면, 그것은 올바른 인민 중의 다수자에 의한 통치여야만 한다.”[각주:9]

 

ㅤ이제 우리는 정치공동체의 진정한 구성원됨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알 수 있을 듯하다. 말하자면, 이것은 민주주의가 자기 지배로 주어지기 위한 조건이다. 앞서 인용한 것과는 다른 저술에서 드워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는 집단의 행위에 책임을 지도록 개인을 대우하는 것이 공정하게 여겨지는 ― 그리고 스스로를 대우한다는 말이 이치에 닿게 여겨지는 ― 개인과 집단 사이의 어떤 연결관계를 기술해야 한다. 도덕적 구성원됨이라는 개념에서 그 이념들을 함께 끌어내보도록 하자. 그 개념으로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스스로를 통치하는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됨이다. 만일 진정한 민주주의가 공동적 의미에서 자치를 제공하는 인민에 의한 통치라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도덕적 구성원됨에 기초한 것이다. ……… 해당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도덕적 구성원이 아니라면 그 다수결주의는 자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다수결 전제는 그러한 요건을 인정한 바가 없다. 유대계 독일인들은 비록 히틀러를 수상직에 취임하게 만든 선거에서 투표를 했지만, 그들을 절멸시키려 했던 정치 공동체의 도덕적 구성원은 아니었다. 따라서 홀로코스트는 독일의 과반수가 그것을 승인했더라도 유대계 독일인들의 자치의 일부가 아니었다.”[각주:10]

 

ㅤ어떤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임을 판단하는 도덕적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민족이나 문화, 역사, 언어, 종교, 지역 따위를 그 기준으로 떠올릴 것이다.[각주:11] 특히 우리에게 민족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크게 와닿는다. 그러나 국민국가가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반드시 혈통과 같은 협소한 기준에 의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적법 혹은 이민법은 조상이 다른 외국인도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귀화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한국의 경우 외국인의 귀화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들 중에서 “품행이 단정할 것”도 포함된다. 한국에만 이런 기준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선량한 도덕적 인격(good moral charcter)”을, 영국은 “선량한 인격(good character)”을, 프랑스는 “건전한 생활태도와 품행(bounnes vie et moeurs)”을, 일본은 “소행이 선량할 것(素行 善良)”을 그 요건으로 하고 있다. 다만 대체로 도덕적 기준이란 상당히 모호한 것이고, 여기에는 학자에 따라 추가적인 조건을 붙일 수 있다. 이를테면, 공동체에 대한 애착감이나 헌신과 같은 심리적인 조건들 말이다.

ㅤ국내 정주 외국인이 도덕적 구성원으로 평가되기 충분하다는 견해가 옳더라도, 여전히 법적 절차는 중요하다. 도덕적 구성원됨의 한 사례는 어떤 정치공동체 내부에서 구성원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경우 ― 유대계 독일인은 분명 독일인이었으나, 나치 치하에서 그들은 박해를 받고 학살당했다 ― 지만, 지금 우리가 다루는 문제는 원래 구성원이 아닌 자를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것인지다. 헌법은 한민족이 조상이거나 한국어를 구사하거나 김치를 잘 먹는 사람이 국민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국민이 되는 요건을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한다. 국적법이 도덕적 기준을 반영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귀화 조건으로 도덕적 기준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러한 기준을 갖춘 자가 곧바로 국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법적 절차, 곧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개인의 의사와 그것을 승인하는 정치공동체의 의사가 필요하다.

ㅤ쌍방의 의사가 합치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 절차는 일종의 계약으로 비친다. 마치 이것은 역사 속의 위대한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국가의 탄생을 계약에 의한 것으로 묘사한 일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사회계약은 인류의 역사과정에 실재하지 않았지만, 기존 국적을 버리고 자신이 귀의하려는 정치공동체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일은 지금 여기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그러니 사람들은 좀 더 친절한 설명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가령 그 의사는 꼭 명시적으로 표명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암묵적으로라도 충분한가? 또는 어떤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해당 정치공동체의 승인은 필수적인가? 아니면 모든 사람은 국적을 선택할 자유를 가지며 이는 천부적 권리이므로 그러한 승인은 불필요하고 승인 없이도 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 애당초 정치공동체가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사람을 선별할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

ㅤ세계의 여러 국가는 전혀 다른 출신 배경을 가진 이들도 자국 국민이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면서도, 법령에서 외국인이 자국 국적을 취득하는 것을 일정한 사유로 불허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정치공동체가 이러한 권리를 갖는 것이 어떤 추상적인 원칙에 의거하여 정당화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과 특별한 방식으로 동일시되는 집단에 의해 통치받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역사 속의 식민 지배는 참정권의 확대가 아니라 식민지의 독립으로 종식되었음을 상기하자. 어느 정치공동체든 배타성과 폐쇄성은 이렇듯 정서적으로 강력한 믿음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론적 혼동?

ㅤ누군가는 내 주장이 국민주권의 원리와 민주주의를 동일시하는 혼동을 범하고 있으며,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진 낡고 편협한 국민국가가 민주주의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억누르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학자들 중에는 헌법 해석상 국민 개념의 확장을 통해 국민주권주의 아래에서도 외국인의 참정권이 긍정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진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나는 국민주권과 민주주의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 바 없다. 민주주의는 어느 이론서의 한 챕터 모퉁이에 박제된 채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헌법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헌법은 그것이 규율하고 효력을 미치는 정치공동체를 전제하고 있으며, 헌법이 민주주의를 규정했다면 그 규정은 바로 해당 정치공동체와 관계되는 것이다. 민주적인 헌법에 따라 자기 지배가 주어진 사람은 그 헌법이 전제한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이지 다른 질서에 의한 통치를 받는 외부인이나 전지구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이들의 이상향 속 세계시민이 될 수 없다.

ㅤ헌법은 정치공동체의 의사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권력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되는 요건을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가 제정한 법률로 정하라고 규정한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헌법상 참정권의 귀속주체인 “국민”을 결정짓는 기준이 국적 취득이라는 형식적 요건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정치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치적 의사형성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지 여부가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그러한 적격 심사에 사용될 기준은 도덕적 구성원됨의 조건이 될 것이며, 한국인의 정체성과 관련한 구조적 특징들로 제안될 것이다. 예컨대, 구성원으로 평가되려면 그에 걸맞은 기본 소양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이 원활히 가능할 정도의 국어능력을 갖추고 한국의 풍습과 문화에 대해 이해하고 있을 것이 요구된다. 또한, 한국에 주소를 두고 몇 년간 생활을 지속하고 있거나 공동체의 안보에 위해를 끼친 적이 없어야 한다는 제한적인 조건을 추가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조건은 이미 국적법 ―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요건을 정한 법률 ― 에 규정되어있다.

ㅤ헌법 해석의 어려움은 겉보기에 난해한 이론적 혼동보다 더 깊은 곳에 놓여있다. 이를테면, 헌법은 국민이 주권자라고 규정하면서도 주권자인 국민의 범위를 법률로 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과연 타당한가? 주권자는 법의 외부에 그리고 법에 앞서 있는 존재라는 견지에서 보면 법으로 주권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또한, 왜 주권자인 국민이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 논리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에 대해 헌법은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는다. 이 문제도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석을 통해 그 답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우리 헌법 해석상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이 허용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Nov 22, 2022

 

*대표이미지 출처: 출처

  1. See Ronald Dworkin, “Forward”, in Ivan Hare and James Weinstein(eds.), Extreme Speech and Democracy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본문으로]

  2. 선거권이 있는 외국인은 출입국관리법 제10조에 따른 영주의 체류자격 취득일 후 3년이 경과한 외국인으로서 같은 법 제34조에 따라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외국인등록대장에 올라 있는 사람이다(공직선거법§15②ⅲ). [본문으로]
  3. 헌재 2007. 6. 28. 2004헌마644 등; 판례집 19-1, 859<883> [본문으로]
  4. 헌법재판소는 과거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권이 헌법상 권리인지 법률상 권리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태도를 보였으나(헌재 2009. 3. 26. 2007헌마843; 판례집 21-1상, 651<667>), 이후 결정에서 이것 역시 다른 선거권과 마찬가지로 헌법 제24조에 의해 보호되는 헌법상의 권리라고 판시했다(헌재 2016. 10. 27. 2014헌마797; 판례집 28-2상, 763<771>). [본문으로]
  5. 헌재 2019. 8. 29. 2017헌마442; 판례집 31-2상, 204<212> [본문으로]
  6. 헌재 2010. 11. 2. 2010헌마626 [본문으로]
  7. 법무부, “출입국통계 [본문으로]
  8. 헌법재판소는 참정권 보장의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에 근거한 법리를 전개한다. “민주주의는 피치자가 곧 치자가 되는 치자와 피치자의 자동성을 뜻하기 때문에 공무담임권을 통해 최대 다수의 최대 정치참여, 자치참여의 기회를 보장하여야 하는 것이며, 그 제한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이고 필요 부득이한 경우에 국한되어야 한다.” 헌재 1991. 3. 11. 90헌마28; 판례집 3, 63<81> [본문으로]
  9. 로널드 드워킨. 정의론 (서울: 민음사, 2015), 587면 [본문으로]
  10. 로널드 드워킨. 자유의 법 (서울: 미지북스, 2019), 42-43면 [본문으로]
  11. 드워킨은 도덕적 구성원됨의 조건을 논하면서 그 조건에는 구조적인 것과 관계적인 것이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정치적 역사나 문화를 공유해야 한다는 주장은 구조적 조건에 해당한다. 다만 책에서 드워킨은 관계적인 것에 더 집중한다. 드워킨, 전게서(주10), 44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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