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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세이

아동의 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by Hershel Layton 2023. 5. 5.

ㅤ일반적으로 민주적 법치국가에서 신체형corporal punishment은 금지된다. 정부는 도둑의 손목을 자르거나 사기꾼을 채찍질할 수 없고, 그런 내용의 법률을 제정하거나 판결을 내릴 권한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법에 따라, 특히 헌법의 요구에 의해 금지된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렇지만 샤리아sharia 실제로 지배적인 힘을 가진 몇몇 국가에서는 정부가 교리와 종교적 관습에 위배되는 행위를 신체형으로 다스린다. 재작년 인도네시아에서 한 커플은 혼외정사를 이유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매질을 당했다. 그곳의 인권단체와 다른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은 사람의 신체에 끔찍한 고통을 가하는 처벌이 보편적 인권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설령 무슬림 원리주의자들이 문화적 차이를 방패막이로 삼지 않고 종교의 자유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할지라도, 사람들은 이를 터무니없는 변명으로 여길 것이다. 종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인간이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도덕경찰을 빙자한 광신도 무리가 종교의 자유를 운위하며 이교도와 무신론자를 위협하는 행태를 우리가 용인할 수 있겠는가?

ㅤ그러나 다소 생소한 어떤 사례는 체벌과 종교가 반드시 제정일치 사회에서만 문제시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1996년 영국의 교육법(Education Act 1996)은 학교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한 체벌을 사실상 전면 금지했다. 그러자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 교육 방식을 고집하던 일부 사립학교와 학부모들은 해당 법률이 유럽인권협약(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에 의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면서 법적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적절한 경우 체벌을 통한 훈육이 아동의 교육에 필수적이라는 기독교적 믿음을 앞세워 1996년 교육법이 종교의 자유와 종교적 신념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교육할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최고 법원이었던 귀족원House of Lords은 1996년 교육법이 종교의 자유에 기초한 부모의 권리를 제한하지만, 아동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데 있어 체벌 금지와 같은 간섭이 정당하다고 보았다.[각주:1] 결과적으로 그들의 청구는 기각되었다. 하지만 만약 법원이 그렇게 판결하지 않았더라면 무슨일이 벌어졌을까? 아마도 “아이들은 다시금 어른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매를 맞아야 했을 것이다.”[각주:2]

ㅤ법률가들 사이에서 신체형이 전근대적이고 야만적인 잔혹한 형벌이자 개인의 존엄과 인격을 무시하는 중대한 인권침해라는 점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런데 교육 목적상 행해지는 체벌은 어떤가? 과거 학교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책임지고 회초리를 맞아야 했지만, 그것이 신체형의 한 종류인 태형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관해서는 수긍할 만큼 정치한 해명이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아마 그런 해명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체벌과 태형 사이에는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논하는데 회초리의 두께가 1cm인가 3cm인가, 재질이 싸리나무인가 대나무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만일 정말로 문제의 본질이 회초리의 종류와 때리는 방법이라면, 아이들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로서 대우하지 않기로 합의한 다음에야 그 문제를 정직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ㅤ대체로 어른들은 아이들의 권리를 불편하게 생각한다. 두발의 길이와 색을 통제하지 않으면 질서가 문란해질 것이라 우려하고, 체벌이 금지되면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것이라고 걱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어찌 보면 새로운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도 권력자는 시민들이 자신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언짢게 여긴다. 만일 국회가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금지하고 위반자를 10대 이하의 태형에 처한다는 법률을 정한다면, 이는 명백히 위헌이다. 시민들은 억압적인 조치를 비난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할 때 그것이 허용된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술이나 담배처럼 건강에 해로운 일이라서 아동의 건강을 위해 불가피하게 금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아동의 머리카락에서는 인체에 대단히 유해한 방사선이 지속적으로 방출되기 때문에 국가안보 혹은 공공복리를 위해서라도 통제해야 하는가? 오늘날 이런 의문은 어리석은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아이들의 머리카락이 길고 짧음은 진정한 쟁점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들의 권리는 그들의 자유를 통제하려는 어른들로부터 도전받고 있다.

ㅤ어른들이 일정한 경우에 아이들을 상대로 자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대표적으로 친권자인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바로잡고 훈계할 권리가 있으며, 교사는 부모가 교육권을 위탁한 국가로부터 교육책임을 위임받아 학생을 가르칠 직무상의 권한을 행사한다. 그러나 가르칠 권리와 권한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헌법재판소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부모의 교육권은 자녀의 보호와 인격발현을 위해 부여되는 기본권이다. 즉, 부모의 자녀교육권은 자녀의 행복이란 관점에서 보장되는 것이다. 자녀의 행복은 부모의 교육에 있어서 그 방향을 결정하는 지침이 된다.[각주:3] 이 같은 해석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그리고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선언한 헌법 제10조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아동은 소유물이 아니라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동이 단지 부모나 교사의 어떤 장대한 계획의 일부로서 취급된다면, 이는 아동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ㅤ교실에서 몰지각한 행동을 보이는 학생들의 태도는 아동의 권리에 맞서 어른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여론이 고조되는 원인이다. 학생이 교사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할 때마다 대중의 정서는 어른들의 요구에 힘을 실어주는 방향으로 기운다. 교원과 학부모 그리고 종교인으로 구성된 단체들은 이 사태의 배후에 있는 학생인권조례를 하루 빨리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행패를 부리는 몇몇 학생의 책임에 아동 모두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의 존망이 달려있다는 주장은 과연 이성적인가? 한편으로 어쩌면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일지도 모른다. 교회 권력과 도그마dogma에 사로잡힌 신도들은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 학생인권조례가 동성애를 조장한다며 반대했다. 다만 종교가 현실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은 일단 차치하고, 학문적으로 정말 그 조례가 반기독교적이라는 견해를 검토하는 것이 중요한지는 의심스럽다. 기독교인이 기독교의 교리를 따라야 할지라도, 이교도나 무신론자는 그에 따를 이유가 없다. 시민 모두가 법 앞에 평등한 공화국에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종교가 우월적 지위를 주장할 수 없다.

ㅤ오히려 이론적으로 강력한 적수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법에 근거해 엄격한 기준과 조건이 준수된다면 체벌을 허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제한적 허용론”은 체벌의 합법성을 지지하는 온건한 입장으로 보였다. 물론 그들의 바람과 달리, 선생이 아이를 때릴 수 있다면 그 권한은 창의적인 방식으로 끔찍한 데 사용될 수 있다. 읽기 시간에 목소리가 작은 아이를 책상 위에 무릎 꿇게 하거나, 영어 발음이 서툰 아이의 귀에 빨래집게를 꽂아놓거나,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한 아이의 허벅지를 걷어차거나, 중간고사가 끝난 뒤 성적에 따라 뺨을 한 대씩 칠 수 있다. 과거에도 체벌의 기준과 조건은 엄격했다. 단지 지켜진 적이 없을 뿐이다. 온건파는, 조금 나쁘게 말하자면 은밀한 공범이었다. 몇몇 이들은 체벌을 금지하려면 대안이 필요하며, 새로운 제도가 정착할 때까지는 체벌이 과도기적으로 존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입으로 아동의 인권을 역설하는 동시에 아동의 인권에 대한 가장 심대한 제약이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 누구도 여성할례나 조혼 그밖의 무수한 인권침해 사례를 근절하자고 주장하면서 그것의 대안을 요구하지 않는다. 체벌이 인권침해로 판정되었다면 그 즉시 중단되어야 한다.

ㅤ보수적인 학부모와 교육관료, 정치인들은 체벌이 금지되면 통제권을 상실한 교사들이 더는 교실에서 날뛰는 아이들을 관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따금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사건들은 인과관계가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채 이들의 공포감을 뒷받침하고 강화했다. 하지만 구둣발로 차거나 대걸레 자루로 구타하는 것과 같은 유형의 체벌은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기 20년 전에도 불법이었다.[각주:4] 교육적 의미를 고지하지 않은 채 교사의 성격이나 감정에서 비롯한 경우는 물론이고, 개별적인 훈육으로 지도할 수 있는데도 공개적으로 체벌ㆍ모욕을 가하거나, 신체 혹은 정신건강에 위험한 물건을 이용하여 부상의 위험이 있는 부위를 때리거나, 학생의 성별ㆍ연령ㆍ개인적 사정에 비추어 견디기 어려운 모욕감을 주는 행위도 마찬가지였다.[각주:5] 미성년자를 향한 성인의 손찌검이 합법성을 얻기 위해 엄격한 조건을 빠짐없이 충족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지만, 교육 현장에서 체벌은 법이 허용한 것보다 더 넓은 교사의 재량에 맡겨졌다. 통제받지 않는 권력은 아이가 아니라 어른의 손에 있었다.

ㅤ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이후 표면적으로 아동에 대한 통제권은 그 조례로 말미암아 상실된 것으로 보였다. 통제와 억압이 탁월한 교육 방법이라고 확신한 교사와 학부모들은 항의했고, 그들을 대신해서 교육부장관이 법적 이의를 제기했다. 법원에서 한바탕 전투가 치러졌고, 그 싸움은 최고 법원인 대법원을 무대로 펼쳐졌다. 1996년 교육법에 의한 체벌 금지가 문제시되었던 영국과 달리 이곳에서는 교육부장관이 아닌 지방의회가 피고의 역할을 맡았지만, 그러한 차이점보다 더 중요한 공통점은 소송에서 아이들이 대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훗날 영국의 대법원장을 지낸 해일 남작(Baroness Hale of Richmond)Williamson 사건에서 작성한 보충의견은 여기서도 유효했다. “법원에서 아이들을 대신해 발언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전투는 어른들이 선택한 땅에서 벌어졌다.”[각주:6] 첫 싸움은 교육부장관과 교육감, 지방의회 간의 권한 다툼에 그쳤을 뿐, 아동의 권리에 관한 언급은 전무했다.[각주:7] 그러나 두 번째 싸움에서 법원은 조례의 내용이 상위법에 위배되는지를 심사하면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법원의 판단은 명료했다: “그 내용은 모두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에서 당연히 도출되는 학생의 권리를 학교생활의 영역에서 구체화화여 열거한 것이다.”[각주:8]

 

“이러한 관련 법령과 이 사건 조례안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이 사건 조례안은 전체적으로 헌법과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이미 관련 법령에 의하여 인정되는 학생의 권리를 열거하여 그와 같은 권리가 학생에게 보장되는 것임을 확인하고 학교생활과 학교 교육과정에서 학생의 인권 보호가 실현될 수 있도록 그 내용을 구체화하고 있는 데 불과할 뿐, 법령에 의하여 인정되지 아니하였던 새로운 권리를 학생에게 부여하거나 학교운영자나 학교의 장, 교사 등에게 새로운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법원의 판결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들이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심리적 만족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목표하는 바를 실질적으로 성취하려면 지방의 조례가 아니라 이 나라의 헌법을 폐지해야 할 것이다. 혹은 헌법을 개정하는 방법을 고려할 수도 있다. “친권자와 교육자는 무엇이든 원하는 방식으로 아동을 교육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내용의 조항을 추가하려면 정부는 UN아동권리협약(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을 준수해야 할 국제법상 의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존중하고 보호해야 할 기본적인 국가의무마저 저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 뒤에 남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국가와 유사한 무엇일 것이다. 인권을 옹호하지 않는 국가는 강도떼와 다르지 않다.[각주:9]

ㅤ그러나 한편으로 학생인권조례가 평가절하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헌법과 국제법에서 이미 아동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데, 왜 조례가 추가적으로 필요한가? 먼저 학생인권조례의 가장 큰 공로는 법인식의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에 있다. 권리는 다윗이 골리앗에 맞서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아무도 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권리는 신성한 보검이라기보다는 낡은 부적에 가까울 것이다. 과거 인권은 자연법을 경멸하는 이들에 의해 실체가 없는 상상 내지는 신화로 여겨지거나 국왕의 폭정에 대항하는 토템totem으로 취급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있다(헌법 제10조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며 국가에게 이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한다. “인류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고유의 존엄성 및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및 평화의 기초”라는 신념은 국제연합헌장에서 선언한 원칙의 일부를 이룬다). 학생인권조례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아동의 권리를 재확인하는 데 공헌했다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조례는 헌법상 권리를 학교라는 공간적 영역 안에서 구체화했다. 헌법의 언어는 추상적이며,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곧바로 집행되기 어렵다. 사람들이 아동의 권리가 무엇인지 그 세부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조례는 법질서 내에서 아동의 권리를 인식하고 발견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형식을 제공한다.

ㅤ우리는 아동의 권리가 성인의 권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아동에 대한 지원에는 아동의 보호자를 지원하는 것이 포함되며, 그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각주:10] 나는 이전에 사회적 소수자인 부모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그 슬하에 있는 자녀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을 주장한 바 있다.[각주:11] 이는 학교에서도 동일한데, 교사에 대한 적절한 지원 없이 아동의 권리가 실현되리라 기대하기는 힘들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교육 현장과 관련한 논의의 많은 부분은 아동의 권리와 부모 및 교사의 권리를 서로 반목하는 이항적 대립 관계로 설정하고 있으며, 미디어는 그 잘못된 프레임을 재생산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각주:12] 아동의 권리는 특권이 아니라 보편적 인권이고, 인권에는 아동의 권리와 교사의 권리가 모두 포함된다. 교사는 학교 경영자나 교육관료 혹은 학부모, 심지어는 자신이 가르쳐야 할 학생으로부터 모욕과 협박, 폭언, 폭행을 당할 수 있다. 이 경우 교사의 권리가 침해되었음은 명백하다. 우리는 교사가 무방비 상태로 빈번하게 폭력에 노출된다면 교육 현장은 부정적인 환경에 잠식될 것이고, 교사가 받게 되는 충격은 직간접적으로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ㅤ하지만 늘 그렇듯 무엇이 법인가에 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법이 보장하는 교사의 권리는 무엇인가? 가령 교사는 인격권을 가진다. 따라서 누군든지 교사에게 폭언하거나 그를 비방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학생이 수업 시간에 졸거나 딴짓을 하는 것도 권리를 침해하는가? 상당수의 교사는 진지하게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교육활동 침해 행위 및 조치 기준에 관한 고시」가 개정되자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교원의 90%가 “수업 중 잠자기,” “수업 방해 행위,” “교사 지시 불응 행위”를 교권 침해 사례에 포함해야 한다고 응답한 설문조사 결과를 언급하면서, 교육부가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교원의 정당한 생활지도에 불응하여 의도적으로 교육활동을 방해하는 행위”를 교권 침해로 규정했다고 논평했다.[각주:13] 글쎄, 수업 중 잠자기가 언제나 “의도적”으로 그런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식곤증을 교권 침해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오답노트를 부실하게 작성하거나 수학에 흥미가 없다고 답한 학생이 교육활동을 “방해”한 것인지 또는 생활지도에 “불응”한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정말 수업 시간에 자는 학생들은 교사의 권리를 침해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떤 권리를 침해하는가?

ㅤ한 응답은 그 권리란 교육할 권리라고 한다. 교수권, 교육권 혹은 학생교육권, 수업권 등 그 명칭의 여하는 무엇이라도 좋다. 핵심은, 그 내용이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교사의 수업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인가? 그것은 오히려 권리라기보다는 직무상의 권한이라고 봄이 타당하며,[각주:14] 설령 이를 권리라고 할지라도 법률적 차원에서 보장되는 것이지 헌법상 기본권은 아니다.[각주:15] 반대로 학생의 학습권(수학권)은 기본권이며, 수업권은 학생의 학습권 실현을 위하여 인정되는 것으로 학생의 학습권은 교원의 수업권에 대하여 우월한 지위에 있다.[각주:16]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우리가 알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 충분한 진실을 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한다: 수업 시간에 잠을 자거나 수업을 방해하는 아이는 누구에게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한국교총의 논평은 아동의 잘못을 훈육의 대상이 아니라 업무방해로 인지하고 있다. 그들은 교육이 아닌 처벌을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게 지나친 평가인가? 제재와 순응은 교육보다는 권력에 가깝다. 권력에 근접하게 정의된 수업권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보살피는 목적에 봉사하지 않는다. 아마 그 권한은 체벌이 허용되었던 시기의 통제권보다 약하지만 세련된 버전일 것이다.

ㅤ한편으로, 우리는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다. 숙제를 하지 않았다고 출석부로 머리를 얻어맞은 아이가 법률 지식이 풍부한 성인이었다면 변호사를 선임했을까? 실은, 짓궂은 상상력이 무색하게도 현실에서 아동이 재력가나 고위 공직자 또는 그 자녀였다면 교사가 꽃으로라도 때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본래 강한 쪽에서 약한 쪽으로 흐르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누군가는 이 주장의 전제가 사실적이지 않다며 반대할지도 모른다: 경험적으로 풍족한 집안의 자제는 숙제를 빼먹지 않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 따라서 강남 8학군의 아이들이 매를 맞을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이 타당하고 진실에 부합한다면, 우리는 그 이면에 있는 또 다른 암울한 상황을 피할 수 없다: 물질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결핍이 있는 집안의 아이는 숙제를 자주 빼먹고, 선생님의 말씀을 안 듣고, 무례하게 행동한다. 나는 이 전제의 많은 부분이 과장된 선입견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랑의 매”를 맞는 사람은 부유한 부모를 둔 아이들보다는 주로 가난한 부모를 둔 아이들이 될 것이다. 가정에서 결핍에 노출된 아이들은 학교에서는 폭력에 노출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불평등이 은밀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ㅤ“정의란 각자에게 그의 권리를 주고자 하는 항구적이고 영속적인 의지”이며,[각주:17] “법의 계명은 각자에게 합당한 몫을 주는 것”이다.[각주:18] 인권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하는 권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공공재다. 누구든 그 공공의 자원에 접근하고 이를 이용하는 데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원은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다. 인권은 “인(人)”권, 곧 인간의 권리인데도 그 앞에 추가로 붙은 수많은 수식어가 이를 증명한다. 동성애자의 인권, 트랜스젠더의 인권, 장애인의 인권, 미혼모의 인권, 여성의 인권, 노인의 인권, 이주민의 인권, 노동자의 인권, 범죄 피해자의 인권 …. 그 수식어들 가운데 하나는 아동이다. 그들은 모두 인간이다. 그들에게는 인권이 필요하다. 인권에는 무엇이 있는가? 표현의 자유, 사상과 양심 및 종교의 자유, 결사의 자유와 평화적 집회의 자유는 그것의 한 예시이며, 이러한 권리는 헌법과 UN아동권리협약,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에 규정되어있다.

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학교정책에 항의하려 교문 앞에서 시위하는 경우란 상상하기 힘들다. 여전히 학교는 이유를 불문하고 교칙으로 학생의 집단행동을 금지하고 있다. 집단행동을 주동하거나 이에 동조한 학생은 최대 퇴학에 해당하는 징계를 받을 수 있다. 법원이 궁극적으로 학생의 손을 들어주리라는 기대와는 별개로, 생활지도규정이 주는 위협의 힘은 실재적이다. 학교 측이 헌법과 국제법보다 교칙을 앞세운다면 학생은 지루한 싸움에 휘말릴 것이다. 부모가 자녀의 안전을 위해 아동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경우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부당한 처우와 폭력에 맞서 등교를 거부하는 경우에도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 지난해 경남에서 한 교사가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을 상대로 폭언과 막말을 일삼은 사건[각주:19]이 있었을 당시, 신문과 방송은 “학생들이 등교를 거부했다”고 보도했지만, 그 행동이 아이들의 자발적 의사에 따른 것인지 혹은 부모가 자녀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는지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하나, 아이들이 스스로 동맹을 맺은들 등교 거부에 대한 평가나 판단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당한 행동이었다.

ㅤ아동이 자신의 의지로 부모의 종교와는 다른 선택지를 고르는 것은 등교를 거부하는 일보다 더 어렵다. 독실한 기독교인은 자녀가 신의 은총을 받기를 원하지, 자유로운 선택에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일상에서 이러한 사례는 대개 정부와 개인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곧 부모와 아동 사이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아동이 부모의 종교적 신념과 달리 미션 스쿨에 진학하기를 원하지 않더라도, 헌법재판소는 헌법소원의 성립에 요구되는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가 없다는 이유에서 아동의 청구를 배척할 것이다. 반면, 무신론자인 학생이 종교수업을 강제하는 미션 스쿨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쉽지 않을지언정 불가능하지는 않다.[각주:20]

ㅤ아동과 부모의 생각이 일치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아동은 부모와 함께 신앙을 공유하고 진지하게 창조주를 믿을 수 있다. 또는 종교 자체를 경멸하는 부모처럼 절대자란 나약한 이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신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부모가 어떤 견해를 가졌는지와 아동이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서로 다른 문제다. 미국의 연방대법관 더글러스(William O. Dogulas)는 개인으로서든 법관으로서든 논쟁적이고 논란이 많지만, 나는 그의 의견을 잠시 인용하고자 한다. Wisconsin v. Yoder 사건에서 더글러스가 지적했듯이 부모의 의사와는 별개로 아동의 의사가 고려되어야 한다.[각주:21] “이 중차대한 교육 문제에 대해 나는 아이들이 심리할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아이는 그것이 선호하는 진로라고 결정할 수도 있고, 혹은 반항할 수도 있다. 우리가 권리장전Bill of Rights 그리고 학생들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권리에 대해 말한 바에 완전한 의미를 부여하려면 부모가 아닌 학생의 판단이 필수적이다.”[각주:22] 아동은 권리의 주체다. 권리의 주체는 권리를 소유하고 이를 행사한다. 부모의 재산property으로 종속될 때 아동은 주체성을 상실한다.

ㅤ더글러스가 이 의견을 썼을 당시 미국 헌법의 역사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종종 소수의견은 아동을 재산으로 여기던 전통적인 견해에 반기를 들었다. Planned Parenthood v. Danforth 사건에서 다수의견은 미성년자가 성인과 마찬가지로 헌법에 의해 보호받고 헌법상 권리를 가진다고 판시했다.[각주:23] 다만 그 권리는 온전하지 않았으며, 이따금 몇몇 판결에서는 위태로워 보였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대법원은 수많은 판결을 통해 아동을 헌법상 권리의 보유자로 인정하고 있지만, 종립 사립고교 종교교육 사건[각주:24]에서 몇몇 대법관은 아동의 역량에 심각한 의문을 표했다. 그들의 주장은 아동이 미성숙하기 때문에 종교적 신념을 가질 수 없다는 견해로 비쳤다.[각주:25]

 

“위와 같은 종교교육 거부의 의사가 학생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나 확신에 기초한 것인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고등학생이라는 그 연령대가 아직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인격적으로 미성숙의 성장단계임을 감안한다면 학생 본인의 의사표현만 가지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부모의 태도 등을 충분히 고려하여 본인의 진지한 성찰을 거친 것임이 명확히 확증될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부모도 이에 동의한 경우라야 할 것이다.”

 

신념은 개인의 고유한 인격과 불가분하다. 부모는 아이를 위해 경전을 읽어줄 수 있으나, 생각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 옳고 그름을 판단해 줄 때, 선악에 관한 생각은 부모로부터 나온 것이지, 아이에게 비롯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상과 양심 및 종교의 자유가 개인의 개성에 대한 신뢰 위에서 보장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사실 이 점은 다른 권리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주종관계에서 인격이나 개성, 고유성을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ㅤ이 문제는 진중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법원이 종교 교육을 거부하는 자녀의 청구를 인용하려면 부모의 동의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고 가정하자. 부모는 자녀의 의사를 수용하거나 배척할 것이다. 부모가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아동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를 자유를 잃을 것이다. 혹은 부모는 자녀의 결정에 동의할 수 있다. 부모의 허락을 받은 아동은 더는 종교수업을 듣거나 예배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으로 그는 자유로워졌는가? 우리는 아이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스키너(Quentin Skinner)의 문제 의식을 고려한다: 인자한 주인을 둔 노예는 자유로운가?[각주:26] 논점은 표현에 있지 않다. 어떠한 아동도 부모가 무언가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해서 노예 상태로 전락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핵심은 관계에 있다. 부모는 아동에 대한 일차적인 보호자로서 어떤 역할이 요구된다.

ㅤ아동의 특정한 법률행위는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사용자는 18세 미만인 사람(이는 곧 UN아동권리협약과 아동복지법에 따른 아동과 일치한다)을 고용하는 경우 친권자나 후견인의 동의서를 사업장에 갖추어 두어야 한다.[각주:27] 이처럼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이며, 그 기준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조금 더 검토할 것이 있다. 어떤 사례는 동의가 절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역으로 부모가 아동에게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944년 Prince v. Massachusetts 사건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은 12세 미만의 소년과 18세 미만의 소녀가 길거리에서 잡지를 판매할 수 없도록 정한 노동법이 합헌이라고 결정했다.[각주:28] 그리고 최근 “셰어런팅Sharenting”이라고 불리는, 어린 자녀의 생활상을 소셜 미디어에 게시하는 부모들의 행동은 비판받고 있다. 이 두 가지 사례는 각각 전자와 후자에 해당한다. 부모가 동의하더라도 아이는 노동현장에 투입될 수 없다. 부모가 자녀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얼굴과 신상을 공개하는 것은 사생활 침해를 야기한다.

ㅤ각 사안에서 부모의 의사를 압도하는 것은 바로 아동의 이익이다. 보호자의 동의가 아동의 이익에 의해 뒷받침되고 정당성을 얻는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UN아동권리협약은 공공 또는 민간 사회복지기관, 법원, 행정당국 혹은 입법기관 등에 의해 실시되는 아동에 관한 모든 활동에 있어서 아동의 최선의 이익best interests of the child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규정하며,[각주:29] 아동복지법 또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각주:30] 그렇지만 무엇이 아동에게 최선의 이익인가? 그것은 공허하고 불확정적인 개념이며, 그 적용은 오로지 법원의 광범위한 재량에 맡겨진 것인가?[각주:31] 최선의 이익 원칙은 법의 일부이며, 판사는 법에 따라 재판할 것이다. 법정에서 부모는 아동의 의사에 반하는 종교 교육과 체벌이 최선의 이익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아동을 때리는 데 사용된 효자손에는 “사랑의 매”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들은 진지하게 그것이 옳은 방법이며 장기적으로 볼 때 아동에게 유익하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회초리를 드는 것이 보호자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이 법인가에 관해서, 최선의 이익이 백지수표blank check와 같은 것은 아니다. 그 누구도 거짓말하는 아이를 고문하는 행동이 최선의 이익에 부합하는 교육이라고 변호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양육권 분쟁에서 가부장제와 최선의 이익을 동일시하는 해석은 평등에 반하며 법에 의해 거부될 것이다. 우리는 올바른 답을 찾아야 한다.

ㅤ나는 이 글의 본문과 행간에서 반복된 논변을 다시금 상기시키고자 한다. 권리를 개인이 지닌 으뜸패trumps로 보는 것은 중요하다.[각주:32] 권리를 부여하고 이를 보호하는 것은 존엄성을 존중하는 데 핵심적이다. 이것은 우리가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목적이라는 칸트(Immanuel Kant)의 원칙을 확인하는 일이다.[각주:33] 아동은 소유물이 아닌 소유자고, 객체가 아닌 주체이며, 수단이 아닌 목적이다. 아동에 대한 의사결정의 중심에는 아동의 권리가 놓여있어야 한다. 국가와 사회, 교사, 부모의 의무는 틀림없이 중요한 고려사항이지만, 일정한 경우에 아동의 권리를 강조하는 관점은 공동체나 보호자의 의무를 강조하는 것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 의무는 아동의 권리를 고려하지 않고 식별될 수 있다. 이때 의무를 강조하면 아이는 중심에서 멀어지고, 그 자리를 다른 이가 차지하게 된다. 특히 아동 외의 인물들, 예컨대 앞선 사례들에서 부모나 교사, 종교인의 관점으로 식별된 의무는 체벌이 허용되고 종교 교육을 강제하는 환경에서 아동을 양육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무는 아동에게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부 아동은 부모가 그들의 의무를 생각하는 방식 때문에 종교와 신체의 자유를 넘어서 생명권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의 “신생아 수혈 거부 사건”[각주:34] 같은 사례를 염두에 둔다.

ㅤ물론 아동의 권리에 관한 담론에서 모든 관점을 “보호”와 “자율”로 양분하는 지나친 이분법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아동 권리 프로그램을 찾는 데 있어 우리는 아동의 온전성과 의사결정능력을 인정해야 하지만, 동시에 완전한 해방의 위험에 주목해야 한다.”[각주:35]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는 어떤 점에서는 필수적이다. 국가는 청소년의 복지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할 의무가 있다.[각주:36] 이와 관련해 근래 대법원 판결을 참고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각주:37]

 

“국가와 사회는 아동ㆍ청소년에 대하여 다양한 보호의무를 부담한다. … 법원도 아동ㆍ청소년이 피해자인 사건에서 아동ㆍ청소년이 특별히 보호되어야 할 대상임을 전제로 판단해 왔다. … 이와 같이 아동ㆍ청소년을 보호하고자 하는 이유는, 아동ㆍ청소년은 사회적ㆍ문화적 제약 등으로 아직 온전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인지적ㆍ심리적ㆍ관계적 자원의 부족으로 타인의 성적 침해 또는 착취행위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른과 아이 사이에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만일 누군가 아동과 성인이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 어떠한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도덕주의 오류에 해당한다. 학교 주변의 어린이 보호구역을 철폐하는 것은 아동의 권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은 체격이 왜소하므로 운전자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신체적 차이보다는 나이에 있다. 형법은 14세부터 책임능력이 있다고 간주한다. 민법은 17세에 달하지 않은 사람의 유언에 효력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는 법률의 문구가 아니라 그 뒤편에 놓인 질문 자체다. 아동은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할 능력이 있는가? 자기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자각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보기에 어린이는 말 그대로 “어린”이다.

ㅤ아동에게 보호가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이러한 의문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 이상으로, 이보다 근본적인 의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 능력capacity 내지는 역량이 없는 자에게 권리를 가질 자격이 있는가? 애들이 사랑이 뭔지 아는가? 임신과 출산이 무엇인지 아는가? 삶과 죽음의 의미를 아는가? 일부는 권리를 능력과 연결 지을 수 있다: 아이들은 권리를 가질 능력이 부족하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민법 제3조 ― “사람은 생존한 동안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다” ― 를 언급하는 것은 만족스럽지 않다. 권리가 능력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은 기본 전제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권리의 원천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목한다.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이라도 생명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또한, 공직선거법은 18세부터 선거권을 부여하지만, 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지능, 체력, 부, 명성 등)과 관계없이 부여한다. 사실 과거 여성과 흑인이 “능력 부족”으로 참정권을 비롯한 여러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던 역사에 비추어볼 때 어떤 능력 개념에 권리를 결부하는 것은 새로울 게 없는 주장이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틀렸지만, 그릇된 도덕적 기반 위에 정초되었다는 점에서도 틀렸다. 능력을 기준으로 삼으면 권리는 보편성이 아니라 배타성을 띠게 된다. 곧, 능력 있는 자들의 특권이 된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지 않고, 능력 있는 자들만 평등할 것이다. 권리 담론에서 주로 권력이 없는 이들의 사례를 중심으로 권리 프로그램이 구상되고 주장되었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지점이다. 우리는 킹(Martin Luther King Jr.)과 앤서니(Susan B. Anthony)뿐만 아니라, 로크(John Locke)와 루소(Jean-Jacques Rousseau)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한 연구는 권리란 무력함powerless을 전제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권리는 힘없는 이들을 향하여 내리막길로 흐른다: 그것은 지배권과 권력을, 이를 가진 사람으로부터 갖지 않은 사람에게로 옮기고, 관계를 평등하게 한다.”[각주:38]

ㅤ어느 사회든 민주주의가 전반적으로 성숙해지더라도, 소외당한 이들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는 환경은 몇 걸음 더디게 발전했다. 이러한 진전이 투쟁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를 어떤 역사의 필연으로 치부하는 것은 나태한 태도일뿐더러, 역사적 진실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눈에 띄는 몇몇 의견은 아동해방의 이상과 목표에 공감하면서도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하거나 망설인다. “아동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 그렇게 그들은 긴 단서를 덧붙인다. 맞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다. 우리는 쉬운 길과 어려운 길 가운데 후자를 택해야 한다. 미래를 향한 낙관적 전망은 우리가 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기로 결심한 때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May 5, 2023

 

*대표이미지 출처: 유엔아동권리협약 아이콘 포스터 1면

 

  1. R (Williamson) v. Secretary of State for Education and Employment [2005] UKHL 15 [본문으로]
  2. Michael Freeman, “Why It Remains Important to Take Children’s Rights Seriously,” International Journal of Children’s Rights (vol.15, no.1, 2007), p.6 [본문으로]
  3. 헌재 2000. 4. 27. 98헌가16 등, 판례집 12-1, 427<447> [본문으로]
  4. 대법원 1990. 2. 27. 선고 89다카16178 판결, 공1990. 4. 15. (870), 762; 대법원 1988. 1. 12. 선고 87다카2240 판결, 공1988. 3. 1. (819), 402 [본문으로]
  5. 대법원 2004. 6. 10. 선고 2001도5380 판결, 공2004. 7. 15. (206), 1187 [본문으로]
  6. R (Williamson) v. Secretary of State for Education and Employment [2005] UKHL 15, para. 71 [본문으로]
  7. 대법원 2013. 11. 28. 선고 2012추15 판결, 공2014상,83 [본문으로]
  8. 대법원 2015. 5. 14. 선고 2013추98 판결, 공2015상 810<815> [본문으로]
  9.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정의가 없는 왕국이란 거대한 강도떼가 아니면 무엇인가?(Remota justitia, quid sunt regna nisi magna latrocinia?)De civitate Dei, l. IV, c. 4 [본문으로]
  10. Michael Freeman, supra note 2, p.16 [본문으로]
  11. 나의 글, “성전환자의 삶에 대한 권리” (2022년 12월 7일)를 보라. [본문으로]
  12. 이기일ㆍ성열관, “학생인권은 교권에 대립하는가?:교권 대 학생인권 프레임에 대한 비판적 담론분석,” 『교육사회학연구』 (vol.22, no.4, 2012), 171-197면을 보라. [본문으로]
  13. 교육부의 ‘생활지도 불응, 의도적 교육활동 방해 행위=교권침해 행위 고시안’에 대한 입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보도자료 (2023년 2월 24일) [본문으로]
  14. 헌재 1992. 11. 12. 89헌마88, 판례집 4, 739<758> [본문으로]
  15. 헌재 2021. 5. 27. 2018헌마1108, 판례집 33-1, 567<576ff> [본문으로]
  16. 대법원 2007. 9. 20. 선고 2005다25298 판결, 공2007. 10. 15. (284), 1617 [본문으로]
  17. Dig.1.1.10pr [본문으로]
  18. Dig.1.1.10.1 [본문으로]
  19. 이동렬, “초등교사 폭언에 5학년 전체가 등교 거부…무슨 막말 했길래,” 『한국일보』 (2022년 10월 26일), 10면 1단 [본문으로]
  20. 대법원 2010. 4. 22. 선고 2008다38288 전원합의체 판결, 공2010상,897 [본문으로]
  21. Wisconsin v. Yoder, 406 U.S. 205 (1972), at 242 [본문으로]
  22. Wisconsin v. Yoder, 406 U.S. 205 (1972), at 244-245 [본문으로]
  23. Planned Parenthood v. Danforth, 428 U.S. 52 (1976), at 74 [본문으로]
  24. 세간에서는 소송을 제기한 학생의 이름을 따서 “강의석 사건”이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25. 공2010상, 897<917> [본문으로]
  26. See Quentin Skinner. Liberty Before Liberalis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본문으로]
  27. 근로기준법§66 [본문으로]
  28. Prince v. Massachusetts, 321 U.S. 158 (1944) [본문으로]
  29. Art 3, Para 1,  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 [본문으로]
  30. 아동복지법§2③ [본문으로]
  31. 성희자, “아동 최선의 이익 판단의 구체적 기준에 대한 연구: 양육자 지정 대법원 판례를 중심으로,” 『사회과학연구』 (vol.23, no.2, 2012), 7면 [본문으로]
  32. Ronald Dworkin. Taking Rights Seriously (Havard University Press, 1977), p.ⅺ [본문으로]
  33. See Immanuel Kant. Groundwork of The Metaphysics of Moral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Originally published in 1783) [본문으로]
  34. 서울동부지법 2010. 10. 21.자 2010카합2341 결정, 각공2010하,1576 [본문으로]
  35. Michael Freeman, “Taking childern's rights more seriously,” International Journal of Law and the Family (vol.6, no.1, 1992), p.67 [본문으로]
  36. 헌법§34④ [본문으로]
  37. 대법원 2020. 8. 27. 선고 2015도9436 전원합의체 판결, 공2020하, 1872 [본문으로]
  38. Katherine H. Federle, “Rights Flow Downhill,” International Journal of Children’s Rights (vol.2, no.4, 1994), p.36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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