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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세이

성전환자의 삶에 대한 권리

by Hershel Layton 2023. 4. 6.

최근 대법원은 하나의 획기적인 결정을 내렸다. 성전환자가 슬하에 미성년 자녀를 둔 경우에는 가족관계등록부에 기재된 성별을 정정할 수 없다는 종전 판례를 뒤집은 것이다. 다수의견은 성전환자에게 미성년 자녀가 있더라도 그러한 이유만으로 성별 정정을 불허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막연하고 관념적인 우려를 들어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이 미성년 자녀의 복리에 반한다고 보아 이를 일률적ㆍ전면적으로 불허하는 것은 법익 간의 균형을 고려할 때 성전환자의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미성년 자녀의 실질적 복리를 침해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각주:1] 이 결정은 올해 대법원이 내린 판단들 가운데서도 상당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성전환자는 우리 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이지만, 모종의 정치적이거나 종교적 혹은 문화적인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차별과 편견의 시선을 받아왔다. 특히 자신의 교리 외에는 배척할 뿐이거나 엄격한 가족주의 전통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멸시하고 손가락질했다. 이미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을 허가하는 판례가 나온 지 16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후속 입법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하급 법원은 사안을 판단할 때 판례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을 수 밖에 없고, 이러한 점에서 대법원 판례의 변경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ㅤ나는 올해 초에 성전환자의 법적 지위와 헌법상 권리를 주제로 글을 쓰려다가 그만두었다. 당시 집필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이 주제가 첨예한 쟁점을 포괄하고 있으며 한 번에 많은 것을 다루기에는 내 역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훗날을 기약하며 조금 쓰다 만 원고를 지우고 다른 주제에 눈길을 돌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기억에도 먼지가 쌓여갈 때 즈음, 이번 대법원 결정이 나온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삼아 다시 펜을 잡았다. 이 에세이는 최근 결정에 대한 짧은 논평이며 주로 반대의견을 향한 비판에 중점을 두고 작성되었다. 반대의견은 미성년 자녀가 있는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을 불허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여러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해당 논변은 그것이 기초한 근거가 타당하지 않거나 심지어 어떤 것은 부당하고 잔인하기까지 하다. 나는 우선 성전환자와 관련한 기존 대법원 판례를 간략히 검토한 다음, 그 점에 대해 논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생물학적 성에 위화감과 거부감을 갖고 그와 다른 성에 귀속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출생 당시에 유전학적 기준에 따라 지정된 성과는 다른 성을 자신의 성적 정체성으로 인식한다. 이렇듯 출생 시의 성과 성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 문헌에 따라 이 용어가 더 넓은 범주를 포괄한다고 서술하기도 하나 ― 일반적으로 성전환자Transgender라고 부른다. 성전환자는 신체적 성과 정신적 성의 불일치로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으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성정체성에 알맞게 살고자 한다. 경우에 따라 이러한 노력에는 생활양식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여건이 충족되면 의학적인 수술을 통해 자신이 지향하는 성에 적절한 신체적 외관을 형성하려는 것도 포함된다.

ㅤ이러한 삶은 어떤 규범에 의하여 보호되는가? 이번 대법원 결정에서 다수의견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규정한 헌법 제10조와 법 앞의 평등 및 차별 금지를 규정한 헌법 제11조에서 이와 관련된 권리를 도출하고 성전환자의 삶에 대한 보호를 정당화했다. 특히 헌법 제10조에서 선언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는 “개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인격과 개성을 존중받고 이에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삶의 내용과 방향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개척하여 그 자아와 운명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며, 이는 우리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인 성전환자에게도 적용된다고 한다.[각주:2] 이것은 전적으로 옳은 해석이다. 우리 헌법 해석상 도출되는 원칙, 곧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은 정부로부터 ― 사회적 다수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생각하는 ― “좋은 삶”을 강요받지 않고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여 살아갈 권리가 있다.

ㅤ대법원이 성전환자의 법적 지위를 처음 언급한 것은 1996년 강간치상 사건에서였다. 당시 재판에서 피고인들은 성전환자인 피해자를 강간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현행 형법상 강간죄의 객체는 “사람”이지만, 2012년 개정되기 전까지 형법은 “부녀婦女”만을 강간죄의 객체로 규정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의 쟁점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피해자가 부녀, 즉 법률상 여성으로 평가될 수 있는지였다. 대법원은 성을 판단할 때 성염색체의 구성을 기본요소로 하는 생물학적 성과 더불어 정신적ㆍ심리적 성, 사회생활에서 수행하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성역할, 이에 대한 일반인의 태도 등 다양한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논증하면서도, 정작 해당 사건을 재판할 때는 성염색체의 구성과 여성으로서의 생식능력에 집착하여 피해자를 법률상 여성으로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각주:3] 결국 이 사건은 대법원이 검사 측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피고인들의 무죄가 확정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ㅤ이 일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잊혀졌으나 2009년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시 재판은 13년 전과 마찬가지로 피해자가 성전환자였고, 형법은 여전히 강간죄의 객체를 부녀로 규정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전 판결과는 달리 성전환자인 피해자를 법률상 여성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보아 피고인의 강간혐의를 유죄로 판단한 원심판결을 지지했다.[각주:4] 사실 이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이미 2006년 대법원은 여성에서 남성으로의 성전환을 한 사람이 호적부 ― 오늘날 가족관계등록부 ― 상 자신의 성별을 ‘여’에서 ‘남’으로 정정해 달라고 낸 호적 정정 신청을 허가한다는 취지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때 대법원은 법률적으로 평가되는 성을 판단할 때 생물학적 특징만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니고, 정신적ㆍ사회적 요소를 포함하여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했다.[각주:5]

ㅤ다만 대법원은 이후 성전환자가 혼인 중에 있거나 미성년자인 자녀가 있는 경우에 성별 정정을 허가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렇듯 혼인 중에 있거나 미성년자인 자녀를 둔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을 금지한 까닭은 배우자나 미성년자인 자녀의 법적 지위와 그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곤란을 야기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각주:6] 말하자면, 성별 정정이 다른 사람과의 신분관계에 중대한 변동을 초래한다면 법적 안정성의 요청(또는 다른 공익적 요청)에 따라 거부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판례의 내용을 반대해석하면 혼인 중에 있지 않거나 자녀가 장성하여 성년이 된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은 허용될 수 있다는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이번에 대법원이 종전 판례에서 변경한 부분은 “미성년자인 자녀가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새로운 판례에 따르면 혼인 중에 있지 않은 성전환자에게 미성년자인 자녀가 있더라도 성별 정정을 허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결정에 관여한 대법관들 가운데 유일하게 반대의견을 낸 이동원 대법관은 미성년 자녀가 있는 경우를 “다른 사람들과의 신분관계에 중대한 변동을 초래하거나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쳐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사유”로 봤던 종전 판례를 지지하면서 그 규범적 근거로 헌법 제36조를 원용했다. “헌법 제36조 제1항은 …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자 모든 영역에서 공동생활의 근간이 되는 혼인과 가족제도가 양성의 구별을 전제로, 구분되는 양성 간의 결합을 통해 성립되고 유지된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각주:7] 사실 이는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헌법 제36조 제1항은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조항은 종종 동성혼과 성전환에 반대하는 논거로서, 전통적인 가족주의 관념을 옹호하는 이들에 의해 자주 인용되었기 때문이다.

ㅤ그러나 헌법에서 권리장전에 해당하는 제2장의 기본권 조항들을, 그것이 명시적으로 부담을 지우는 경우를 제외하고(가령 헌법 제23조 제2항),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리를 제약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그것은 기본권 조항의 취지를 망각한 채 개인의 권리를 부당하게 축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가령 헌법 제24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선거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헌법재판소는 이것의 의미를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서만 선거권이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보장되는 선거권의 내용과 절차를 법률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성해야 한다’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고 해석한다.[각주:8] 이것은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려는 헌법의 본래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해석 방식이다. 다수의견은 헌법 제36조 제1항에 근거하여 “성전환자 또한 전체 법질서 안에서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아야 하고, 국가는 성전환자의 이러한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헌법을 올바르게 해석한 것이다.[각주:9]

ㅤ이동원 대법관은 헌법 제36조 제1항을 주춧돌로 삼아 ― 헌법의 목표와 그 조항이 보호하고자 하는 권리보다는 ― 법의 “체계”에 주목하여 헌법과 민법에서 “아버지는 남자를, 어머니는 여자를 전제로 하고 있음”이 명확하고 “자녀가 있는 성전환자에 대하여 성별 정정을 허가하는 것은 우리 법령 체계상 허용되지 아니하는 부모자녀 관계를 창설하는 것이 된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자녀의 복지를 위하여 친권자 개인의 기본권 제한도 감수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미성년 자녀를 둔 사람의 성별 정정이 허용됨에 따라 “타인이 받게 될 불이익”으로 자녀의 복리에 대한 침해를 강조했다.[각주:10] 한데 전술한 내용은 성별 정정을 불허해야 할 이유보다는 아예 성전환 자체를 금지해야 할 이유에 더 가깝다. 즉, 이동원 대법관의 관점대로 해석된 법은 미성년 자녀가 있는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을 불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성전환이 금지되어야 한다고 본다.

ㅤ2006년 결정에서 대법원은 “성전환자의 경우에는 출생 시의 성과 현재 법률적으로 평가되는 성이 달라 성에 관한 호적의 기재가 현재의 진정한 신분관계를 공시하지 못하게 되므로 현재 법률적으로 평가되는 성이 호적에 반영되어야 한다”라고 판단했다.[각주:11] 이는 표현을 달리 하면 한 사람의 법적인 성별은 공부에 기재된 내용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 사람의 성이 법률적으로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는 말이 된다. 법원의 결정은 성전환에 따라 법률적으로 새로이 평가받게 된 현재의 진정한 성별을 확인해주는 것이지, 성전환을 허용하거나 불허한다는 취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각주:12] 이동원 대법관은 마치 법원이 성별 정정을 허가함으로써 새로운 신분관계가 창설되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그 신분관계는 이미 법원의 결정에 선행하여 전환된 성이 법률적인 성으로 승인되는 순간부터 존재하고 있다.[각주:13] 그렇다면 성별 정정으로 인해 발생할 “문제” 가운데 상당 부분은 벌써 발생했거나 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이 대법관은 이 점을 어느 정도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결정문에서 재판 당사자가 처한 상황이 “부모의 전환된 성에 따라 자연스러운 가족관계가 형성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ㅤ법원이 개인의 성전환을 금지하는 것은 가능한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듯 근대 입헌국가의 정치 원리인 법치주의에 따르면 국민의 권리를 제한할 때는 반드시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 근거해야 하며, 그 법률은 절차적으로 정당한 과정을 거쳐 제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 또한 정당해야 한다. 우리는 미성년 자녀가 있는 사람의 성전환을 금지하는 법률을 가지고 있지 않고, 설령 그런 법률이 있더라도 위헌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반대자의 전략은 기존 헌법과 법률의 해석을 통해 법이 성별 정정을 일정한 경우에 금지한다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나 이 전략은 온건하게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 내세우는 논리는 미성년 자녀가 있는 사람의 성전환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반대의견에서는 이러한 낌새가 드러나는데, “(혼인과 출생을 통해 가족관계를 형성한 형성한 이후) 이와 같은 단계에서의 성전환 문제는 성별 정정이 아니라 성별 변경의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는 설명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성전환자의 삶에 대한 동등한 존중과 배려가 ― 단지 개개인의 시혜에 달린 것이 아닌 ― 헌법적 요청에 따른 것이라는 점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성적 정체성은 자아와 관계된 것이며, 사람은 자아를 발견하고 실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존엄한 존재임을 깨닫고 인생관을 정립하며 자기 삶의 서사를 완성해 간다. 이러한 자아의 실현과 관련한 기본권은 헌법 제10조에서 보장하고 있는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에 전제된 자기(운명)결정권이다. 자기결정권은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간이 자신의 생활영역에서 인격의 발현과 삶의 방식에 관한 근본적인 결정을 자율적으로 내릴 수 있는 권리다.[각주:14]국가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고,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개인의 존재와 삶의 양식에 중대한 의미를 가지며 자기결정권의 한 내용을 이루고 있으므로 존중과 보호를 받아야 한다.

ㅤ다만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타인의 정당한 이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용인될 수 있다는 일반적인 한계를 고려할 때 자기결정권도 무제한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 반대의견이 꾸준히 제기하는 ― 성전환 또는 성별 정정을 제한하는 논거로서 “타인이 받게 될 불이익”, 다시 말해 미성년 자녀가 받게 될 불이익으로 향한다. 반대의견에 따르면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이 미성년 자녀에게 가져올 구체적인 “불이익”이란 요컨대 “성전환 및 성별 정정을 한 부모를 둔 미성년인 자녀가 받게 될 정신적 혼란, 충격”이다.[각주:15] 그 외의 것은 너무 추상적이고 공허하기 때문에(반대의견이 언급한 “우리 사회가 보호해야 할 다양하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성전환자의 구체적이고 확정적인 권리를 제한하는 근거로 사용되기에는 부적합하다.

ㅤ이번 대법원 결정에서 다수의견은 미성년 자녀가 있음을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 허가의 독자적인 소극 요건으로 본 2011년 판례가 변경되어야 한다고 결정했지만, 이동원 대법관은 해당 판례에서 소극 요건이 정립됐다는 견해를 부정했다. 그는 그보다 이전에 내려진 2006년 결정에서 대법원이 “다른 사람들과의 신분 관계에 중대한 변동을 초래하거나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아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성별 정정 허가의 “기본적인 원칙”으로 제시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2011년 결정에서 “미성년 자녀가 있는 경우”를 언급한 것은 특정 요건을 새롭게 설정한 것이 아니라 이 원칙에 어긋나는 본보기를 명시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각주:16] 그러나 소극 요건이 처음부터 존재했는지, 아니면 그 후에 새로 생긴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각주:17] 어쨌거나 오늘날 대법원이 반대의견을 일축하고 바꾼 구시대 판례의 취지는 성전환자에게 미성년 자녀가 있다면 성별 정정이 불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ㅤ과거 기준에 따를 때 성전환자한테 미성년 자녀가 있다는 사정은 ― 설령 그가 전환된 성에 따른 삶을 성실히 살고 있을지라도 ― 법원이 성별 정정을 허용하지 말아야 할 절대적인 조건이다. 종전 판례의 태도는 법원이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 신청을 인용함으로써 미성년 자녀가 받게 될 정신적 충격과 혼란이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손해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부모의 성별 정정으로 야기될 심리적 자극이 미성년 자녀의 복리에 끼칠 악영향을 우려하여 미성년 자녀가 있다는 사실이 곧 성전환자의 기본권 행사를 저지하는 만능패wild card라는 주장은 성전환자인 부모와 미성년자인 자녀로 구성된 가정이라면 부모의 성별 정정이 허용되었을 때 그러한 해악이 예외 없이 발생하며 중대하고 명백하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고 여겨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주장은 타당성을 잃는다. 이번 대법원 결정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부모의 성전환에 의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가정에서 부모와의 유대관계를 안정적이고 새롭게 형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이런 가능성을 배제한 채 일률적으로 미성년 자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성별 정정을 불허하면 오히려 그것이 하나의 불공정이자 자녀의 복리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다.

ㅤ그런데 이것 외에도 결정적으로 반대 주장은 잘못된 전제를 깔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녀의 정신적 충격이 부모의 성별 정정에 기인한다는 전제다. 나는 앞에서 성별 정정으로 인해 나타날 “문제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벌써 발생했거나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엄밀히 말하면 자녀의 복리에 미치는 해악은 ― 내가 생각하기에 그 해악이란 상당히 모호하고 의심스럽지만 ― 법원이 성별 정정을 허가할 것인지 결정하기에 선행하는 단계에서, 곧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성전환에 필요한 사실적 조치(호르몬 처방과 수술 등)를 취하여 성전환이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기정 사실이 되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대 주장은 전제 자체가 틀렸다. 성별 정정을 허가하는 법원의 결정이 성전환자의 자녀에게 심리적 충격을 주는 것은 아니며, 자녀의 충격은 아버지 또는 어머니의 성전환에 따른 가정 환경의 변화에서 유래한다고 봄이 논리적으로 이치에 닿는다.

ㅤ결국 전술한 바는 앞의 절에서 살펴본 내용을 답습한 다른 판본에 지나지 않는다. 미성년 자녀가 있는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을 불허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는 미성년 자녀를 둔 사람의 성전환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의 논거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법관들 앞에 놓인 주제는 성전환을 허락할 것인지가 아니라 성별 정정을 허가할 것인지다. 자녀의 정신적 혼란과 충격은 부모의 성전환이라는 기정 사실로부터 오는 것이지 공부에 기재된 부모의 성별을 수정하는 작업에서 독립적으로 비롯한 것은 아니므로 법원은 이를 이유로 성별 정정을 불허할 수 없다. 처음부터 그릇된 전제에 의존하던 그 이유란 성립조차 하지 않았다. 설령 성별 정정 허가로 자녀가 추가적인 충격을 받더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부모가 성을 전환하는 일련의 과정에 예속된 것으로서, 독자적으로 성별 정정의 불허를 정당화할 정도의 사유가 되지 못한다.

이동원 대법관이 가담한 반대의견은 겉보기에 미성년 자녀가 있는 사람들의 성별 정정을 제한해야 한다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성전환 자체를 금지해야 하는 논거를 앞세우고 있다. 그는 혼인과 출생 이후부터 성전환 문제는 “성별 정정이 아니라 성별 변경의 문제”이며, 성별 정정에 따른 추가적 혼란이나 충격이 없을 것이라는 반론에 대해 “그와 같은 반론은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 문제를 가족관계등록부상에 성별이 정정되어 기재되는 그 시점 이후의 문제로만 볼 때 가능한 주장”이라고 말했다. “법원은 어느 순간 이후의 단편적인 이익이나 불이익만 측량하여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후 과정에서 예상되는 제반 사정을 모두 종합하여 자녀이 복리에 어떤 결정이 최선인지 진지하고 신중하게 고민해야만 한다.”[각주:18]

ㅤ이 대법관은 논제를 혼동하는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미성년 자녀가 있는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이 허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어쩌면 그는 슬하에 미성년 자녀를 둔 사람이 성을 전환하는 것과 공부에 기재된 성별을 정정하는 것 사이의 구분이 사이비 구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성별 정정이 성전환의 전반적인 과정에 속하는 한 부분이며 그 과정의 가장 종국적인 단계라는 견지에서 볼 때 성전환과 성별 정정을 서로 떼어놓는 이분법이 사이비 구분이라는 견해는 일리가 있다. 이를 고려할 때 반대의견에 좀 더 효과적인 반격을 가하려면 미성년 자녀가 있는 사람의 성전환을 제한해서는 안 되는 이유에 관해 서술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현명하겠다. 다만 나는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성정체성에 따른 인격을 형성하고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음을 이미 설명했다. 그런데도 똑같은 설명을 다시 반복하고 끝내는 것은 지루할 뿐더러 공정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겉모습은 성별 정정을 제한하지만 실체는 성전환을 제한하는 논증의 부당함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중에서 몇 가지를 향한 반론은 이전 절에서 보았으므로 여기에서는 중복되지 않는 선에서 반대 논거를 다룸이 바람직하겠다.

ㅤ이동원 대법관은 민법상 친권에 관한 규정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친권은 … 그 본질상 권리의 성격과 의무의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고 특히 현대에서는 의무로서의 측면이 더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친권자는 ‘자녀의 복리’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친권을 행사하여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녀의 복리’를 위하여 친권자 개인의 기본권 제한도 감수하여야만 한다.”[각주:19] 이 발언은 자녀의 복리가 친권자 개인의 기본권보다 우선한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이익형량의 문제를 환기한다. 잠시 우리 앞에 천칭이 놓여있다고 머릿속으로 상상해보자. 한쪽 저울판에는 성정체성을 좇아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올려져 있고, 그 맞은편에는 “자녀의 복리”와 “친권자의 의무”가 놓여있다. 법관은 무게가 구체적인 수치로 표시되지 않는 여러 가치를 저울질하여 가로대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지를 면밀히 관찰할 것이다. 만약 특정한 조건(가령 권리자가 미성년 자녀를 두고 있다는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맞은편에 위치한 저울판이 아래로 떨어진다면 법관은 바로 그 조건에서 권리를 유보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판단을 얻을 것이다.

ㅤ상충하는 이익을 비교할 때 정확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닌 무게, 즉 중요성을 헤아려야 한다. 이때 법관이 직면하게 될 난관은 그 무게가 구체적인 수치로 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답을 구하려면 서로 충돌하는 이익들 사이의 정치한 비교가 필요하고, 따라서 이익의 내용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지적하고 있듯이 과거 판례와 반대의견이 제시한 “자녀의 복리”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이익이 막연하고 공허하다는 비판은 반대자에게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하지만, 이동원 대법관은 불분명한 표현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자녀의복리’라는 개념이 막연하고 추상적이라고 하여 이를 가벼이 여기고 그 침해 가능성에 대한 주장을 공허하다고 치부해버린다면 ‘자녀의 복리’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사회가 보호하여야 할 다양하고 소중한 가치를 무시하는 결과에 이르고 만다.”[각주:20] 도대체 “다양하고 소중한 가치”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다소 거칠게 말해서, 이 불성실한 답변은 자기도 무엇인지 모르는 개념에 호소하고 있다.

ㅤ결정문 곳곳에서 “자녀의 정신적 충격과 혼란”이 언급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 가지 가능성은 우리가 이 사안에서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녀의 복리”란 어린 자녀가 누려야 할 정서적 평온과 안녕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가 자녀의 정서적 평온과 안녕을 유지하는 데에 힘써야 한다는 내용으로 “친권자의 의무”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자녀의 복리”와 “친권자의 의무”로 말미암아 부모의 자기결정권은 자녀가 성년에 이를 때까지 보류되어야 한다는 제한이 정당화되는지는 의문이다. 나는 이 의문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대신 유사한 사례를 검토하여 해결책을 찾는 데 필요한 영감을 얻고자 한다.

ㅤ이미 우리 사회에서 부모의 삶에 대한 권리와 자녀의 복리가 서로 충돌하는 사례는 숱하게 일어난다. 심지어 그 충돌은 법률이 그와 관계된 절차를 규율함으로써 예고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부부 간의 협의 이혼이다. 국내외의 많은 연구는 부모의 이혼이 미성년 자녀에게 상실감을 겪도록 하고 정신적 충격과 고통을 주며 자녀의 자아존중감을 저하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같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볼 때 미성년 자녀를 둔 부모의 이혼은 전술한 “자녀의 복리”, 곧 그들 자녀의 정서적 평온과 안녕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을 뿐더러 “친권자의 의무”에도 반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자녀의 복리”와 “친권자의 의무”가 성전환을 제한할 정도로 강력한 요청이라면 법은 협의에 의한 이혼을 향해서도 그에 맞먹거나 버금가는 제한을 부과한다고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법전 그 어디에서도 자녀가 성년에 이를 때까지 부부는 이혼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음은 물론이고, 슬하에 미성년 자녀가 있는 부부의 협의 이혼이 금지되어야 한다는 학설이나 판례도 발견할 수 없다.

ㅤ이즈음에서 누군가는 내 말을 끊고 도리어 이혼이 자녀의 복리에 더 적합한 사례가 존재한다고 반박할 수 있다. 이를테면, 부부 간의 극심한 불화(극단적으로 쌍방의 가정폭력과 외도, 장기간의 별거 상태)에 지속적으로 자녀가 노출되는 경우에는 이혼이 그나마 차악일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내가 가정한 이 반론은 협의상 이혼을 통해 부부가 얻을 만족과 자녀의 복리가 상충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그런데 미성년 자녀가 있는 사람의 성전환에도 이 전제에 준하는 기준이 적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성정체성에 따라 살아갈 권리와 자녀의 복리가 서로 반목하지 않는다고 여길 수도 있다. 자신의 성정체성에 따라 인격을 형성하고 삶을 영위할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은 내면의 자아가 지향하는 삶과 ― 국가의 강제에 의하여 ― 외형적으로 드러난 삶의 불일치에 수반하는 심각한 고통을 겪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자녀는 부모가 자기 삶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며 고통과 충격을 전달받게 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위험성은 특히 부모와 자녀가 깊은 유대를 맺고 있다면 더욱 커진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오히려 성정체성에 따라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자녀의 복리에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다.

ㅤ한편 반대의견은 정신적 충격 외에도 자녀의 복리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언급했다. “성전환이나 성별 정정에 대한 사회적인 찬반양론을 떠나 이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편견은 엄연한 현실이므로 이러한 현실에 아직 성숙하지 아니한 미성년인 자녀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받을 고통 역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데, 자녀의 복리가 저해된다는 사정을 단순히 막연한 가능성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그와 같은 문제를 애써 외면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각주:21] 이는 이동원 대법관이 옹호한 2011년 대법원 결정에서 다수의견이 밝힌 이유와 일치한다. 당시 대법원은 우리 사회에서 성소수자가 겪는 “사회적 차별과 편견은 엄연한 현실”이고, “이러한 현실에 아직 성숙하지 않고 감수성이 예민한 미성년 자녀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받을 고통”을 고려한다면 성별 정정은 불허되어야 하며, “이러한 사회적 차별과 편견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도록 하는 것은 친권자로서 기본적 책무를 도외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각주:22]

ㅤ이 의견에 가담한 대법관들은 현실론이 그럴듯한 논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사실 이 논변은 굉장히 비겁하며 잘못되었다. 이 논변은 헌법이 목표로 하는 가치와 원칙(인간의 존엄성, 법 앞의 평등, 차별 금지 등)을 외면하고 성소수자와 그들의 자녀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 불가항력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다. 애당초 그것은 아무런 규범적인 힘을 가질 수 없는데도 말이다. 생각건대, 이 논변이 제안한 기준을 좇는 다른 판본의 주장들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흑인이 받는 차별과 편견은 엄연한 현실이고 이러한 현실에 정서적으로 민감한 미성년 자녀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받을 고통을 고려한다면 흑인이 백인 자녀를 입양하는 것은 금지되어야 한다.”, “장애인이 받는 차별과 편견은 엄연한 현실이므로 그들의 자녀가 태어나 받게 될 고통을 고려한다면 장애인에 대한 강제불임수술은 정당화된다.” 이런 혐오스럽고 끔찍한 주장을 수긍하는 것은 아파르트헤이트와 나치 시대 유산의 상속자를 자처하는 태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이 의견에 가담한 대법관들이 차별주의자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대 논거들 중에서 특히나 잘못된 논거다. 법원은 기본권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지, 차별적 무리의 대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대법원이 인정한 성전환자의 권리는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권리이자 공화국의 평등한 시민이라면 누구든 향유하는 권리이며, 자기 삶과 관련된 본질적이고 인격적인 영역에 속하는 사항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다. 성전환자의 삶을 가볍고 우습게 여기는 이들과 오랜 세월 성전환자의 바람을 방치하고 외면한 입법자의 태도는 실존을 위해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야 하는 그들의 괴로움과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김선수 대법관과 오경미 대법관이 작성한 보충의견은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1차 전원합의체 결정 이후로 16년 동안 성전환을 위한 법률 제도의 마련이 지연됨에 따라 여전히 소외의 그늘 속에 있어야 하는 성전환자들은 동등한 권리의 보장을 절박하게 외치고 있다. 기성의 굳은 질서가 만들어 내는 얼음장 같은 침묵을 깨고 울려 나오는 성전환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각주:23]

ㅤ이동원 대법관은 미성년 자녀를 둔 사람이 성전환과 성별 정정을 결정하는 데 더 신중하고 진지한 자세를 견지하도록 바라는 것은 우리 사회가 자기 선택에 따라 가정을 꾸린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요청이라는 의견을 밝혔다.[각주:24] 이 견해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왜 그러한 배려를 요구하는 방법이 성전환 내지는 성별 정정의 금지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미성년 자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성전환이나 성별 정정을 금지한다면 개인은 자아가 억압되고 부정당하는 불행한 인생을 장기간 강요받아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목표는 부모와 자녀 가운데 어느 하나에 일방적으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최대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미성년 자녀가 있는 사람이 성전환 이전에 전문가와의 상담 등 필요한 조력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적절한 제도적 절차를 마련하는 것으로도 그 목표의 절반은 달성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우리 사회가 삶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성전환자가 차별받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감으로써 채워질 것이다.

 

Dec 7, 2022

 

*대표이미지 출처: 대한민국대법원

  1. 대법원 2022. 11. 24.자 2020스616 전원합의체 결정; 공2023상,178 [본문으로]
  2. 공2023상, 182 [본문으로]
  3. 대법원 1996. 6. 11. 선고 96도791 판결; 공1996. 8. 1. (15), 2264 [본문으로]
  4. 대법원 2009. 9. 10. 선고 2009도3580 판결; 공2009하, 1701 [본문으로]
  5. 대법원 2006. 6. 22.자 2004스42 전원합의체 결정; 공2006. 8. 1. (255), 1341<1345> [본문으로]
  6. 대법원 2011. 9. 2.자 2009스117 전원합의체 결정; 공2011하, 2087 [본문으로]
  7. 공2023상, 188 [본문으로]
  8. 헌재 2019. 8. 29. 2017헌마442; 판례집 31-2상, 204<212> [본문으로]
  9. 공2023상, 183 [본문으로]
  10. 공2023상, 188 [본문으로]
  11. 대법원 2006. 6. 22.자 2004스42 전원합의체 결정; 공2006. 8. 1. (255), 1341<1347> [본문으로]
  12. 물론 법원은 재판 과정에서 신청인의 법률적 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실체적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사안에서 반대의견은 성별 정정을 신청한 사람의 전환된 성을 법률적 성으로 볼 수 없다는 판단이 아니라 법령의 체계와 자녀의 복리에 반한다는 이유 때문에 성별 정정을 불허해야 한다고 보았다. [본문으로]
  13. 대법원은 성별 정정 허가가 성전환에 따라 법률적으로 새로이 평가받게 된 현재의 진정한 성별을 확인하는 취지의 결정이므로 성별 정정 허가 결정이나 이에 기초한 공부상 성별란 정정의 효과가 기존의 신분관계와 권리 의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본다. 대법원 2004스42 전원합의체 결정; 공2006. 8. 1. (225), 1348 [본문으로]
  14. 헌재 2019. 4. 11. 2017헌바127; 판례집 31-1, 404<416> [본문으로]
  15. 공2023상, 190 [본문으로]
  16. 공2023상, 187 [본문으로]
  17. 2006년 판례는 전환된 성이 법률적 성으로 평가받을 수 있음을 설시하면서 “전환된 성을 그 사람의 성이라고 보더라도 다른 사람과의 신분관계에 중대한 변동을 초래하지 않거나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아니하여 사회적으로 허용된다고 볼 수 있다면…”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공2006. 8. 1. (225), 1346. 반대의견은 이것이 기본 원칙이며 미성년 자녀를 둔 사람의 성별 정정을 허용함이 이 원칙에 반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면, 다수의견에 가담한 박정화, 노정희, 이흥구 대법관은 2006년 판례에서 대법원이 “호적 정정 허가 결정이나 이에 기초한 호적상 성별란 정정의 효과는 기존의 신분관계 및 권리 의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판시한 점을 들어 반대의견의 주장이 해당 판례의 의의를 부당하게 축소하였다고 비판했다. 공2023상, 193. 또한, 이들은 그러한 비판의 근거로 2006년 판례의 보충의견을 끌어왔는데, 당시 김지형 대법관이 홀로 작성한 그 의견은 “다수의견의 견해는 ‘성전환자가 다른 사람과의 신분관계에 변동을 초래하거나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을 소극적 요건으로 설정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공2006. 8. 1. (225), 1361.
    생각건대, 보충의견에 일리가 없지는 않더라도, 반대의견의 주장이 각 판례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했다. 이렇게 생각한 까닭은, 2006년 판례를 보면 대법원은 구체적으로 사건을 검토할 때 신청인이 미혼이고 그에게 자녀가 없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공2006. 8. 1. (225), 1349. 만약 “혼인 중에 있거나 미성년 자녀가 있는 경우”라는 소극 요건이 ― 2006년 판례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 2011년 판례를 통해 형성되었다는 관점에 서게 된다면 2006년 판례에서 당사자의 혼인 여부 및 자녀의 유무를 검토한 이유가 쉬이 설명되지 않는다. 법원이 사건에 적용될 어떤 기준과 무관한 사실관계를 검토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리고 2011년 판례는 “가족관계등록부상의 성별 표시에 대한 정정을 허가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신분관계에 변동을 초래하거나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아니하여 사회적으로 허용된다고 볼 수 있는 등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하므로, 성별 정정으로 배우자나 자녀와의 신분관계에 중대한 변경을 초래하거나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현저한 경우 등 특별한 사정이 있다면, 성별 정정을 허용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전제하면서 “미성년 자녀가 있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공2011하, 2087.
    다만 나는 반대의견이 타당하기 때문에 판례 변경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각주로 뒷받침하려는 문장이 명시하듯이, 소극 요건이 언제 생겼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바는 대법원이 “성전환자에게 미성년 자녀가 있는 경우 성전환자의 가족관계등록부상 성별 정정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판례들을 이번 결정의 견해에 배치되는 범위에서 모두 변경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것의 기원이 무엇인지를 논쟁하는 것은 아무런 실익이 없다는 점이다. 다수의견의 입장에서는 설령 반대의견의 주장대로 성전환자의 기본권을 가로막는 원흉이 2006년 판례라도 이번 결정에 따라 해당 판례는 2011년 판례와 마찬가지로 변경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8. 공2023상, 191 [본문으로]
  19. 공2023상, 190 [본문으로]
  20. 공2023상, 190 [본문으로]
  21. 공2023상, 190 [본문으로]
  22. 공2011하, 2087 [본문으로]
  23. 공2023상, 200 [본문으로]
  24. 공2023상, 19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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