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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세이

잠재적 가해자론과 시민적 의무

by Hershel Layton 2023. 4. 5.

ㅤ재작년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 성인지 교육[각주:1]을 목적으로 제작한 한 동영상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었다. “잠재적 가해자의 시민적 의무”라는 제목의 이 동영상은 남녀 사이의 불평등을 다루면서 많은 사람이 수용하기 어려운 기이한 논변을 포함했다. 당시 원장이자 강사로 나선 나윤경 교수는 다음과 같은 취지로 청중을 “교육”하고자 했다: 여성의 평균적 경험상 남성을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로 여길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으므로, 남성은 자신이 가해자, 곧 음담패설을 일삼는 무뢰한이나 파렴치한 성추행범 같은 부류의 사람과 다르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증명할 시민적 의무가 있다.[각주:2]

 

“… 의심하면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냐’며 화를 내고, 의심하지 않으면 ‘스스로 성폭력을 자초해서 남성을 곤경에 빠뜨리는 꽃뱀’이라며 비난하죠. 그러므로 여성들은 남성들을 의심하고 경계할 수밖에 없는 경험들을 갖게 됩니다. 그 의심과 경계가 여성의 생존 확률을 높이니까요. 이럴 때 남성들은 그 의심을 기분 나빠하기보다는 자신은 나쁜 남성들과는 다른 사람임을 증명하며 노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양평원은 이러한 노력을 시민적 의무라고 정의합니다. 특정 상황에서 남성과 거리를 유지하고 경계하려는 여성들의 노력이나 남성들에게 성인지적 태도와 감수성을 제시하려는 교육에 대해 왜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라고 취급하느냐고 화를 내기보다는 스스로가 가해자인 남성과 다른 사람임을 정성스레 증명하려는 노력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ㅤ이 논변은 대중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누구든 특정한 성별을 타고났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범죄자가 아님을 입증할 의무가 있다는 말을 역겨워했다. 강의가 끝날 즈음에 나윤경 교수는 “성인지 교육은 남자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의심해서 행하는 교육이 아니”라고 덧붙였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류였거나 혹은 고의로 진실을 은폐하는 행동이었다. 앞서 보았듯 그의 주장은 남성이 여성에게 잠재적 가해자로 의심받는 것에 경험상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전제했다. 즉, 남성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경험적 이유에서 가해자로 의심받는다는 가정에 터 잡아 남성이 스스로 그런 사람이 아님을 증명할 의무가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의심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허용되기 어려운 모순이다.

ㅤ논란이 커지자 나윤경 교수는 『한겨례』와의 인터뷰에서 일부 표현이 경솔했다며 한발 물러선 모습을 보였다.[각주:3] 하지만 이후 『여성신문』과의 인터뷰 그리고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는 시민적 의무 논변을 향한 비판이 부당하다고 항변했다. 그는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다”라는 것과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여기는 여성들이 있다”라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각주:4] 그러나 이는 논점을 회피하기 위한 말장난이다. 그가 이미 인지하고 있듯이 이 논변에서 문제시되는 부분은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는 의심이 합리적이라는 전제다. 비판은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관점이 합리적이라고 옹호하는 전제의 적절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보면 대체로 “시민적 의무”는 선별적이고 일화적인 사례를 통해 설명된다.[각주:5]

 

“몇 년 전부터 공공기관에 전화를 걸면 담당자와 통화하기 전에 ‘직원에게 폭언이나 욕설을 삼가라’는 취지의 안내가 길게 나온다. … 다만 공공기관뿐만이 아니다. 예컨대 개인병원에서조차 벽면마다 ‘의료진은 환자와 함께 질병과 싸우는 누군가의 가족이기에 그들을 존중하라’는 취지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 비행기나 기차 여행을 할 땐 어떤가. 출발 직전 여행의 기쁨을 음미하려는 순간, ‘승무원에 대한 성희롱과 성추행은 법에 저촉되는 행위’임을 상기시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 이런 시도들이 썩 기분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의 ‘기분(기분권)’보다는 노동자 누구에게나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일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기에 나와 대다수 상식적인 시민들은 그 ‘기분 나쁜’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ㅤ하지만 그가 제시한 일화들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부적절하다. 앞서 열거된 예시들, 가령 직원에게 폭언이나 욕설을 삼가라는 안내 메시지, 의료진도 누군가의 가족이기에 그들을 존중하라는 내용의 포스터, 승무원에 대한 성희롱과 성추행은 법에 저촉되는 행위임을 상기시키는 안내방송 등은 직접적인 해악의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하는 경고이지, 스스로 무고함을 사전에 적극적으로 증명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예컨대, 누군가한테 매표소에서 순서를 지키지 않는 경우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고 말하더라도 그 사람은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행렬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증명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면 당혹스러울 것이다. “다른 이에게 해악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의무와 “가해자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증명하라”는 것은 서로 다른데도 나윤경 교수는 양자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ㅤ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시민적 의무 논변이 “잠재적 가해자론”이라고 명명되는 데 불만을 토로하면서 질문을 던졌다.[각주:6]

 

“또 다시 구구절절 설명하느니 최근 갖게 된 질문 하나를 해보려 한다. 언급했듯, 대다수 시민이 노동권 보호를 위해 안내음과 벽보, 안내방송으로 나오는 직원에 대한 갑질과 성희롱·성추행에 관한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받아들이는데, 남성에 의한 성폭력이 이렇게 자주 발생하는 사회의 ‘어떤’ 남성들은 왜 성폭력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못 견딘다는 것인가. 대체 왜?”

 

ㅤ실제로 페미니스트들은 성폭력범죄 사건에서 가해자의 압도적 다수가 남성이라는 통계를 근거로 여성에 불리한 차별적 구조의 존재를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 통계적 사실로부터 밤길을 혼자 걷는 여성이 자신을 뒤따라오는 남성에게 불안감을 느끼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남성에게 해명할 의무가 있다고 보는 것은 터무니없다. 우리는 여성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고, 여성을 향한 온갖 부당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심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과연 나윤경 교수의 “시민적 의무”와 같은 방식으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 그는 이 문제가 여성의 안전과 관련되어있다고 주장했지만, 남성이 스스로 무고함을 입증한다고 해서 여성의 생존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기대할 근거가 없다. 또한,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실효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선적이다. 때로 성폭력은 피해자의 심리를 지배하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이루어진다. 그때도 가해자는 시민적 의무를 충실히 지키며 피해자에게 “나는 너의 편”이라고 말할 것이다.

ㅤ내가 참을 수 없던 것은 나윤경 교수가 자신을 향한 일련의 비판에 대해서 이를 의심받는 사람의 “기분”으로 폄훼했다는 사실이다. 과연 이 문제가 말 그대로 기분 탓인가?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한 지위는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인종, 국적, 장애, 성별, 성적 지향, 세계관적 신조 등 외적 또는 내적으로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 짓는 요소는 그 사람의 존엄성이 보장받아야 하는 데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백인이라고 해서 흑인보다 더 존엄한 지위에 있는 것은 아니며, 동성애자도 양성애자처럼 존엄한 인간으로 대우받을 자격이 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특정한 정체성 요소를 공유하는 집단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스스로 어떤 구조적 폭력의 가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증명할 책임을 부담해야 하는 시민적 의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해서도 안 된다. 그러한 유형의 시민적 의무가 인정되는 사회는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도덕적 권리와 지위에 관한 시민들 사이의 평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ㅤ우리는 교육진흥원의 성인지 교육 강의에 상응하는 주장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유형의 주장 가운데 하나는 역사적으로 남성이 오랜 시간 여성을 착취하고 억압하였으므로 남자로 태어난 이상 일종의 원죄original sin에 대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이 같은 견해는 현실에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예컨대, 기초생활수급자로서 어렵게 살아가는 한 소년 가장을 향해서 “당신은 한국인 남성이므로 기득권 세력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정당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 주장에 전제된 가정, 곧 인간이 성별에 따라 단일한 정체성 범주를 구성하며 어느 하나가 다른 일방을 착취한다는 가정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일반화되어있다. 만일 어떤 성공한 여성 사업가가 소년 가장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한다면 이는 명백히 부당한 일이지만, 남성을 기득권으로 상정한 구조는 이 사례에 합당한 답을 주지 못한다.

ㅤ그러므로 우리는 다차원적인 사고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양한 사례나 일화를 예시로 들었던 점에 미루어 보아 나윤경 교수도 이 점을 간과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정체성을 평면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입체적으로 인식할 때, 시민적 의무 논변은 다양한 차별적 구조 속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잠재적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남성, 백인, 내국인, 이성애자, 건물주, 고용인 등 어느 하나의 범주에 포함된다면 특정한 차별적 구조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잠재적 가해자다. 반대로 여성, 흑인, 외국인,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노동자 등 어느 하나의 범주에라도 포함된다면 우리는 잠재적 피해자다. 이 범주는 중첩될 수 있다. 우리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시민적 의무를 도대체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러한 복잡성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할 것이다. 만약 백인 여성이 흑인 남성을 잠재적 성폭력 범죄자로 취급한다면 이는 인종적 편견에 근거하여 흑인을 차별하는 것인가, 아니면 여성이 평균적으로 겪는 성폭력 경험에 기인한 정당한 의심인가?

 

Oct 23, 2022

revision Apr 26, 2023

 

  1. 양성평등기본법 제18조 제1항: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사회 모든 영역에서 법령, 정책, 관습 및 각종 제도 등이 여성과 남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는 능력을 증진시키는 교육을 전체 소속 공무원 등에게 실시하여야 한다. [본문으로]
  2. 나윤경, “잠재적 가해자의 시민적 의무,”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2020년 2월 18일). 해당 동영상은 현재 비공개된 상태다. 다만, 인터넷에서 해당 영상의 기록을 찾을 수 있다. https://archive.org/details/redstar_desktop3.0_sign_202303를 보라. [본문으로]
  3. 최윤아, “누군가의 안전과 누군가의 언짢음, 뭐가 더 중요한가,” 『한겨례』 (2021년 4월 15일) [본문으로]
  4. 이하나, “나윤경 양평원 원장 "상대방 입장 고려하는 '역지사지', 공동체 구성원의 의무,” 『여성신문』 (2021년 4월 20일) [본문으로]
  5. 나윤경, “잠재적 가해자‘론’이라니,” 『경향신문』 (2022년 1월 24일) [본문으로]
  6. 나윤경, 앞의 칼럼(주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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